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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역사 포크 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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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역사

 

Ⅰ. 서 론

 

우리 나라 대중 음악의 역사

 

한국의 록음악의 역사는 신중현에서 비롯되었다. 신중현은 일본색 음악을 혐오하면서 1960년대 미국에서 성행한 인종 차별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록 음악을 발빠르게 도입 했을 뿐 아니라 그 음악 정신인 저항과 자유의 정신도 흡수했다. 신중현이 서양의 록음악과 우리 가락을 적절하게 버무려 만든 대표곡은 1974년에 발표한 <미인>이다.

김민기의 노래에는 1970년대라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가 깊이 배여 있었다. 김민기의 음악은 서양에서 1960년대에 유행한 반전·반체제 음악 포크였다. 김민기의 곡에는 <아침이슬>, <친구>, <작은 연못>등이 있다. 유신 정권이 저항적 포크에 철퇴를 내린 뒤에는 송창식·윤형주·김세환 등 통기타 가 수들이 대표하는 저항 요소를 배제한 순수 서정 포크가 등장했다.

트로트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 전통 민요를 대체하는 장르로 등장한 후 우리 나라 의 대표적 유행가요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전성기를 되찾은 트로 트 분야에서 최고스타는 조용필이었다.

1990년대 야당에서 여당으로 탈바꿈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정부는 초기에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 실명제 등 파격적인 정치 공세를 펼쳤다. 대중 음악계는 트로트와 성인층 노래가 주춤하고 랩을 주축으로 다양한 시도가 일어났으며 그 도화선은 단연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리 대중 음악계에 일으킨 핵심은 힙합문화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음반 회사와 방송국은 수명이 긴 음악가를 기르는 전략에서 가 장 짧은 기간 안데 최대의 이윤을 뽑고 새로운 스타로 전환하는 전략으로 바뀌었다. 한편 보수적인 기성 질서와 주류 음악계의 지나친 상업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제도 권 무대 대신 좁은 클럽에서 소수의 매니아를 상대로 음악 활동을 하는 언더 그라운드 밴드들이 있다.


Ⅱ. 본 론

 

60년대 대중음악

 

60년대 음악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좀 더 완숙한 체제로의 음악형태를 나타냈다. 그것은 수난기에서 돌출 되어온 히트곡들의 영향과 더불어 창작인들의 창작욕구를 더 한층 불러 일으켰고 특히 미8군의 방송과 함께 8군 쇼에서 활약한 가수들의 무대진입이 활발히 나타났던 시기였다.

1961년 한명숙의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택시 운전기사들에게까지 유행이 번져 노란셔츠를 입고 운전하는 운전사들의 모습도 비쳐졌다. 같은 해 김희준은 "내사랑 주리안"과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인기를 구가했고 1963년에는 현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밤안개"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다. 미8군쇼는 1963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때 실력있는 가수들이 이 무대를 거치며 활발한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나 초기 때는 개런티를 돈이 아닌 커피나 초콜렛, 술, 빵 등으로 대치됐고 개런티는 약간의 수고비 정도였다. 초기 미8군쇼에서 활약한 팀은 김시스터즈, 김보이즈, 패티김, 이금희, 서수남, 코리안 키튼즈의 윤복희, 한명숙, 임희숙, 신중현 등이 이 8군쇼를 거쳐갔다.

8군에서 이들이 활동하는 반면 전통적이 트로트를 구사하는 가수들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트로트와 신민요 쪽에서 인기를 누렸던 가수들로는 한복남, 박재랑, 이해연, 현인, 명국환, 권혜경 그리고 이미자였다. 이미자는 이미 1950년대 때 "열아홉 순정"으로 인기를 누렸고 이후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등으로 이미자의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1965년 남일해는 "빨간 구두 아가씨"등의 곡을 발표했고 1966년 배호는 "만나면 괴로워", "안개낀 장충단 공원", "마지막 잎새"등을 노래했다. 레코드 회사 역시 1950년대에 비해 2-여개로 늘어났고 오아시스, 대도, 유니버샬, 도미도, 지구, 아세아, 성음 등 유수의 레코드사가 생성됐다. 트로트의 부흥뒤에도 젊은 청소년층의 노래 역시 확산됐다. 50년대 말 명동에 근거지를 둔 "은하수", "영보다방", "돌체"등은 젊은이들의 또 다른 배출욕구의 장소였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디쉐네", "메트로", "시보네"등도 명소로 자리 잡아갔다.

이 시기를 통하여 최동욱, 이종환, 김인권, 박광희. 원종관, 조용호, 이백천, 이선권, 박원 웅 등이 디제이 활동을 벌였으며 후일 방송사가 생기면서 이들은 각각 프로듀서나 방송 DJ로 자리를 옮기는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종환

신중현은 1960년대 초 미8군쇼 무대에서 활약하며 주옥같은 곡을 많이 선보였다. 63년 에 "빗속의 여인", "커피한잔"등을 발표했고 에드4라는 그룹을 조직, 서정길(보컬 리듬), 한영현(베이스 기타), 권순권(드럼)과 함께 이 그룹을 이끌어 갔다. 이때 "키 보이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신중현의 후반 작품들은 더욱 원숙미를 더해주고 있다. "미인", "떠오르는 태양", "거짓말이야", "님은 먼곳에", "안개속의 여인", "너를 사랑하네"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불려지는 명곡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저속하다는 이유로 그가 지은 3백곡중 13 곡이 방송금지로 묶이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룹 add four(애드4) 이후 신중현은 덩키스와 "골드 그레입스" 활동을 거치며 완숙한 음악을 보여주었다.

70년대 대중음악

70년대 대중음악은 포크 음악의 출현과 트로트의 활성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특히 이때는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정부의 음반간여가 심하게 부각된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든 음반에는 건전가요가 수록되었고 "새마을 노래"와 "예비군가"는 직장은 물론 학교, 단체, 공공기관에 걸쳐 20여 년 동안 우리의 귀와 뇌리를 자극했다. "새마을 노래"는 90년대 초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70년 초기에는 한대수, 양희은, 이필원, 박인희 등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통기타 음악이 아닌 하남석, 김정호, 백영규 등으로 이어지는 크로스오버적인 장르의 가수들을 배출해내는 동기도 부여 됐다. 국내에서 활약한 본격적인 포크 가수는 한대수를 뽑는다. 미국 본토에서 포크 음악을 접했던 한대수는 68년 11월 드라마 센터에서 귀국 공연을 열어 많은 젊은층들에게 어필했고 이후 "물좀 주소", "고무신"등을 발표했다, 그 뒤 서유석이 풍자적인 노래로 대학가에서 활약을 했으며 김민기, 양희은, 이필원, 박인희 등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양희은

이필원

특히 이들 중에는 저항가요라는 미명하에 김민기 등이 독재체제로부터 제재를 맏기도 했다. 이후 한대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서유석은 노래를 잠정 그만두었고 양병집과 조동진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노래들도 많이 취입했다. 은희의 "꽃반지 끼고", 윤형주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익", 조영남과 최안순의 "산까치야", 4월과 5월"내가 싫어하는 여자", 에보이스의 "물새의 노래", 양희은의 "새노야", 학생들의 기타 교본으로 채택되기까지 한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백구", "작은 연못"등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발표됐다. 70년대 중반이 되면서 트윈폴리오를 해체한 송창식과 윤형주는 각각 솔로로 활동했고 이정선, 어니언스(임창재, 이수영), 4월과 5월(백순진, 김정호), 박인희, 원 플러스 원, 김세환 등이 포크음악을 펼쳐나갔다. 또 이장희, 석찬, 홍민, 허림, 둘 다섯, 하남석, 정종숙, 김인순 등은 포크의 형식과는 다른 일반 유행음악을 했다. 투 코리안즈의 "벽오동"은 민요형식을 띠기도 했고 이종용의 "너"나 유심초의 "사랑이여"는 포크음악과는 다른 유형의 음악에서 접근했다. 특히 박인희는 청아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시낭송을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종용

 

포크음악 이외에도 70년대는 록과 중창, 트로트의 전성기가 있었다. 중창에서는 버블검, 쉐그린, 뜨와에 므와, 라나에 로스포, 현경과 영애, 투 코리안즈, 서수남과 하청일, 원 플러스 원, 어니언스, 산이슬, 금과은, 하사와 병장, 물레방아, 버들피리 등 중창단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70년대 일대 트로트의 발흥을 일으킨 가수는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였다 이때부터 패티김, 김추자, 김상희, 송대관, 이미자, 조미미, 김부자, 정훈희, 하춘화, 김세레나가 맹추격을 했고 특히 이때 남진과 나훈아의 맞대결은 남자 트로트의 양대 산맥을 그을 만큼 매우 위력적으로 작용됐다. 이때 리사이틀이란 단어가 많이 쓰였고 이들의 펜클럽도 조성이 된 시기였다. 당신 남진의 "님과 함께"는 아이들에게조차 애창됐으며, 나훈아는 남다른 창법으로 "고향역", "감나무골"등을 히트시켰다. 방주연의 "기다리게 해놓고", 김부자의 "사랑이 머물다 간 자리", 박우철의 "잊지마오" 등이 주된 히트곡이었다. 한편으로는 요들송을 하는 김홍철, 샹송분야의 이미배, 칸초네 스타일의 이용복, 재즈 분양에서의 김준, 장우, 임희숙의 활약도 이어졌다.

80년대 대중음악

80년대는 발라드가 강세를 보인 반면 트로트의 약세를 몰고 왔다. 그러나 트로트는 지난 60년대 이후 새로운 차에대 트로트 가수들을 양산해냈으며, 좀더 다원화된 음악들도 선보였다. 80년대에는 정태춘, 배따라기, 신형원, 해바라기, 유익종, 이태원 등이 활약을 했다. 신형원은 서희덕에게 발탁, 불씨, 유리벽 등 젊은 청소년층의 노래를 불러 잔잔한 인기를 얻었다. 특히 신형원은 얼굴 없는 가수란 닉네임을 가지고 작곡가 한돌과 함께 "개똥벌레", "터"등 서민적인 노래를 많이 불렀다. 83년 이주호가 이끄는 해바라기는 "모두가 사랑이에요"등으로 1년여 정상을 차지했고 "내 마음의 보석상자", "사랑으로"등 국민 들의 많은 지지를 얻는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이때 이태원의 "솔개"가 아주 재치있는 가사로 받아들여졌고, 배따라기는 "아빠와 크레파스", "그댄 봄비를 좋아하나요"등 새로운 창법을 선보였다. 또한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의 아픔을 노래한 "바위섬", 88년에 대뷔한 수와진은 길거리가수로 "파초", "새벽아침"등 참신한 노래를 불렀다. 80년대는 그룹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옥슨80의 "불놀이야"의 기폭제로 신중현의 불후의 명작 "아름다운 강산", 록이 가미된 들국화의 "행진", "그것만이 내세상", 다섯손가락의 "새벽기차"가 신선감을 주었다. 이때 특히 가수들간의 듀엣곡도 성행했는데 이정석, 조갑경의 "사랑의 대화", 홍서범 조 갑경의 "내사랑 투유", 이문세와 고은희의 "이별이야기" 윤수일과 최진희가 "찻잔의 이별"들을 발표했다.

81년 민혜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는 발라드의 포구를 열었다. 이후 정수라의 "사 랑이었나", 85년 이광조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선희의 "j에게", "아! 옛날이여", "알고싶어요"를 발표했고 조용필, 이문세, 최성수, 수라, 조하문, 김범룡, 이선희, 유열, 이정석 등이 발라드 음악을 불렀다. 특히 발라드의 확산은 변진섭의 등장으로 더욱 확산됐다. 88년 "홀로 된다는 것", "너에게로 또 다시", "희망사항"등 좋은 반응을 얻었고 89년 김민우의 "사랑일뿐야", "입영열차 안에서", "휴식같은 친구"를 히트시켰다. 이승철은 89년 솔로로 전향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를 발표했고, 이상우는 88년 "슬픈 그림 같은 사랑"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다. 후반부에는 소방차의 인기도 가히 폭발적이었다. 트로트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임종임, 인순이, 방실이, 현철, 현숙, 나미, 주현미, 문희옥, 설운도, 태진아, 김국환, 송대관 등의 전성기가 있었다. 현숙은 "정말로"라는 노래로 일대 트로트의 댄스바람을 가져다 주었고 소울창법을 인용한 윤시내는 "열애", "DJ에게","공부합시다"등을 발표했다. 이은하의 "봄비", 한울타리의 "사랑의 미로",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등을 불렀다. 코미디언 출신 가수 방미의 "날 보러와요"가 대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이어 주현미의 시대가 80년대 트로트를 풍미하게 했다. 약사 출신인 그녀는 84년 "쌍쌍파티"로 시작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사람"등 주옥같은 히트곡을 냈다.. 특히 주현미와 같은 시기에 문희옥 역시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설운도와 현철 역시 대기만 성형으로 설운도는 "마음이 울적해서", 현절은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으로 10여년의 무 명세월을 씻었다. 또한 송대관과 태진아 역시 그 뒤를 이어 롱런의 히트곡을 계속 내면서 남자 4인방 시대를 열었다. 또한 당신을 애절하게 부른 김정수, 김국환의 "타타타"등으로 발라드와 트로트의 활성이 두드러졌던 때였다.

80년대의 또다른 불세출의 가수를 뽑는다면 단연 조용필이다.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대마초 사건으로 인해 심한 굴곡의 역정을 살았다. 그 이후 80년 "창밖의 여자", "촛불", "미워미워미워", "못살겠다 꾀꼬리", "미지의 세계", 그 유명한 "허공"등 수십곡의 히트곡을 연달아 내보였다. 이외에도 남화용의 "회상", "가버린 추억", "홀로가는 길", 소리새의 "그대 그리고 나", 김상배의 "나이팅게일", "몇미터 앞에 두고"와 김종찬의 "사랑이 저만치 가네", "토요일은 밤이 좋아"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태호의 "미스고"도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80년대의 대중음악은 이렇듯 다양한 장르가 한 시기에 어우러져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유행가요를 양산해 냈다.

90년대 대중음악(1990~97)

발라드의 강세를 뒤로하며 김국환의 "타타타"는 대중음악계의 무대를 휩쓸었다. 김수현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드라마에 삽입된 이 노래는 김국환의 초기 음악 "꽃순이". 동요 "은하철도 999"에 이은 대작이었다. 특히나 여성인권문제가 심화되고 있을 무렵 이 노래는 여성들에게도 많은 지지도를 얻었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은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초기 때였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민주화를 갈망하던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들의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치공세를 펴나 갔다. 전반적인 대중음악계는 발라드는 상승세를 타는 반면, 트로트와 성인층의 노래는 주춤하고 대중음악의 새로운 형태인 랩을 주축으로 레게, 하우스, 테크노, 마이애미, 갱스터, 데스, 모던 록까지 다양한 음악시도를 한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외국가수들의 내한공연이 자주 이어졌고 케이블 TV의 개국과 각종 레코드 및 서적이 유입되면서 청소년들의 복장과 악세서리 등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댄스음악을 주축으로 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팬클럽의 힘이 거대해졌을 뿐만 아니라 통신의 발달로 PC통신이 발굴한 스타들도 소수 발굴됐다.

89년 나미의 "인디안 인형처럼" 이후 댄스음악의 활로가 분주해졌다. 92년에 이르러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랩댄스그룹이 탄생되면서 음반시장의 수요확산은 이들에게 엄청난 부를 축적케 해 주었다. 특히 가수들의 초상권 및 팬시용품을 전제로 한 이미지 캐릭터 사업도 거대한 시장으로 발돋움케 했다. 또한 신디사이저와 컴퓨터 미디음악 등을 소수 작곡가들과 미디 프로그래머들의 출현으로 연주자, 즉 세션맨들과 안단들의 퇴보가 이어졌고 휴머니즘적인 요소보다는 막강한 자본과 무제한적인 아이디어로 근대 대중음악의 틀을 깨버리는 소위 노래만을 위한 가창활동이 아닌 프로듀서 개념의 "연출음악"이 생성됐던 것이다. 뉴키즈 온 더 블록의 방한 이후 랩뮤직과 강한 멜로디에 춤이 겸비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커다란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이미 이 시기에는 시퀀서를 다룰 줄 아는 윤상, 손무현 등이 청소년들의 또 다른 감성을 파고들어 나름대로의 색깔을 갖춰 나가기도 한 때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태지 역시 가창만을 하는 가수가 아닌 프로듀서, 엔지니어, 편곡, 자작곡, 연주에 이르기까지 연출자의 몫을 감당해냈다.

94년 가요계에는 대 지각변동이 있었다. 7월경 서태지와 아이들, 뮤, 룰라, 코코, 1과 2 분의 1 등이 강세를 보였던 반면 발라드곡 및 클래식컬한 곡들이 대거 진입, 가요계에 또 다른 이변을 낳았다. 당시 상승곡선을 탔던 가수는 신승훈이었다. 매년 가을 때마다 발라드의 회오리를 일으킨 그는 그해 1백만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 한 곡은 "미소속에 비친 그대", "가을빛 추억", 이풀잎작가가 쓴 "소녀에게", "로미오"등이었다. 4/4분기 초기에는 서태지와 방송프로듀서간의 마찰, 악마찬양설 등으로 서태지의 음반판매고가 다소 뒤떨어졌다. 코코 역시 인기프로의 사회자를 그만두고 인기몰이에 나섰으나 10위권에 머물렀다. 라인음향에 같이 소속됐던 김건모는 영화촬영 문제로 신승훈의 인기를 따라잡지 못했다. 신승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변진섭은 예술성향이 짙은 "니가 오는 날"로 맹추격을 벌였으나 노래가 잔잔하고 작품성에만 의존, 발라드 부문에서는 다소 역부족이었다. 뒤늦게 인기바람을 몰고온 신인 및 중고신인도 대거 등용됐던"마법의 성"은 인기가요차트에서 연속 3위를 차지했다. 잔잔한 선율과 다소 여성스러운 중성의 목소리가 주 매력으로 작용한 이곡은 한동준 1집 때 작곡을 한 김광진의 곡으로 노래도 직접 불러 팬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다. 93년 MBC대학가요제 대상수상자인 전람회는 신승훈을 이은 그룹으로 클래식컬한 멜로디와 화음으로 오디오 매니아들에게 많은 사랑을 얻었다. 젊은층의 가수들 이외에도 중견급 가수들의 활약도 만만치않았다. 패티김과 이미자는 KBS"빅쇼"를 통해 서로의 역량과 가창을 과시했다. 이어진 중견가수들의 활약은 서민들에게도 많은 지지와 박수를 받았다. 조영남을 비롯해 나훈아, 조용필, 이선희 등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가수들이 나와 무게있는 무대를 선보였다. 장외에서는 라이브에 강한 콘서트도 이어졌다. "아침이슬", "백구"등 무수히 많은 히트곡을 낸 양희은은 처음으로 콘서트를 가졌고 10.20 궁정동의 이인중 한사람인 심수봉은 연강홀에서 코러스 가수 장필순은 학전 소극장에서 각각 콘서트를 가졌다. 특히 캐롤송도 반짝하는 음반시장의 성격으로 간간히 취입됐는데 깊이있는 음반은 되지 못했고 몇몇 개그맨들과 코미디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95년도 대중음악계는 미국의 경우처럼 절대적인 시장경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발전적 인물의 등장과 상업주의의 팽창이 한데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특히 이때는 외국 아티스트들의 내한공연이 봇물을 이루었다. 지난 3월 그리스의 작곡 가 야니가 공연을 했고 리차드 막스의 공연에 이어 딥퍼플, 해리코닉주니어, 올포 원, 본조비, 얼 크루, 어쿠스틱 일케미, 스티비 원더, 케니 G, 팻 메스니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국내를 다녀갔다. 이런 해외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이어지자 국내 음반시장의 규모도 아울러 커지기도 했다. 실제 내한공연을 한 가숟르의 앨범 판매고도 월등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질적인 상황만 고려, 공연장의 안전시설과 음향 및 제반시설의 미약함을 단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국내 정상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1월 11일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고별무대를 마련했지만 9월에는 "컴백홈"이란 곡으로 화려하게 데뷔하기도 했다. 국내 가수들중 활발한 활동을 벌인 가수들로는 이승환, 녹색지대, 박진영, 김건모, 신승훈, 노이즈, 솔리드, 디제이덕, 박미경 등이었다. 상반기까지는 룰라의 전무후무한 실적이 있었고 중반기부터는 리메이크 바람도 한몫 거들었다. 박상민의 "청바지 아가씨"를 비롯해 멍키헤드의 "남행열차", 신효범의 "님아", 공일오비의 "슬픈인연", "단발머리",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등 새롭게 재편곡, 신선감을 주기도 했다. 조덕배는 11월 11일 대마관리법 위반으로 경찰에 구속, 아쉬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가요계에 학구파라고 하는 음악인들도 많이 배출된 해였다. 한충완, 정원영, 유정연, 이병우, 더 클래식, 빛과 소금, 전람회 등은 클래식컬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대중들 앞에 순도 높은 음악을 들려줬다. 특히 12월초부터 불기 시작한 재즈 열풍은 김현철, 이소라, 임상아 등에 의해 가속화됐다. 특히 95년도에는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음반사전심의의 폐지문제가 강력히 대두되었던 해였다.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11월 정기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일제시대 이후 60여 년 동안 옥죄어왔던 사전심의제가 폐지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재즈 부문에서는 드라마나 영화, 화장품업계, 심지어 문학계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크나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칙 코리아, 마일즈 데이비스, 빌리 할이데이, 조지 멘슨, 존 포거티, 빌 에반스, 쳇 베이커 등의 음악은 국내 잠식기간을 거쳐 방송음악으로서도 지대한 관심을 갖는 형태로 진전됐다. 96년도에 들어서부터는 안성수가 "영원히 내게"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오랜만에 한영애는 4월 라이브콘서트를 개최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같은 달 "마마스 앤 파파스"의 내한공연이 이어졌다. 5월에는 인켈 아트홀에서 "전람회"의 새로운 앨범에 대한 쇼케이스가 있었다. 5월 11일에는 체조경기장에서 "미스 터 빅"의 내한공연이 이어졌다. 7월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신승훈의 콘서트가 있었다.

10월 들어서는 마이클 프랭스의 내한공연과 같은 달 31일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공연과 11월 20일에는 허비행콕의 공연이 이어지는 등 외국아티스트들의 공연이 활발한 한 해였다. 97년 초기에 오게 되면서 경제 침체로 음반시장 역시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를 못했다. 이소라와 조관우의 새 앨범이 선두권을 차지했고 표절시비로 잠시 주춤했던 HOT가 "캔디", "행복", "위아더 퓨처"등으로 활동을 펼쳐갔다. 유영석이 이끄는 화이트는 가사의 참신성으로 고정적인 팬을 확보했고 HOT에 이은 젝스키스, 영턱스 클럽, 에메랄드 캐슬, 나일론, 넥스트, 김애리, 클론, 지누션, 임창정, 김경호, Ref, 유리상자, 디바, 김종환, 주주클럽, 구피, 유피, 레드 플러스, 유승준, 박진영, 포지션, 부활, 일기예보, 장필순, 자우림, 이승훈, 리아, 이현도, 척, 소찬휘, 주주클럽, 윤도현 밴드, 김원준 등이 대활약을 펼쳤다.

이해에는 최악의 음반시장 침체인데도 불구하고 영화 "접속"의 주제가 사라본의 "사랑 의 송가"는 6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큰 수확을 올렸다. 외국 아티스트들의 내한은 불황의 파장으로 2월 엘자의 공연, 베이비 페이스의 방한, 보이즈 투 맨 방한, 브링크 공연, 10월 9일, 10일 에릭 클랩튼, 유진박 공연이 있었을 뿐 등 예년에 비해 크게 줄어든 편이었다. 특히 97년 11월에는 국내의 금융권의 한파로 IMF로부터 긴급자금을 차임해오는 등 경제의 악순환을 겪었다.


Ⅲ. 결 론 

 

대중 음악역사는 시대마다 영웅을 탄생시켰고,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상황에 영향을 받으며 이어져 왔다.

1960년대는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가 유행을 하면서 노란샤쓰를 입고 운전하는 운전사 들의 모습도 비쳐졌다. 미 8군쇼는 실력이 있는 가수들이 이 무대를 거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해나갔다. 또 이때는 라이도 DJ와 음악다방의 DJ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여 선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종환, 박원웅, 최동욱, 등은 당시에 최고의 DJ로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중창단과 그룹도 결성이 되기 시작하였다. 부르벨즈, 쟈니 브라더스, 에스4 등이 활동 하였다.

70년대는 포크송과 트로트의 활성이 두드러졌다. 특히 정부가 음반에 대하여 간여가 심했다. 포크송의 대부 한대수는 대학가세엇 커다란 유행을 만들었다. 후에 한대수는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요즘은 우리나라에 정착을 하여 음악활동중이다. 김민기는 이 시대의 가장 불운할 가수였다. 발표하는 곡마다 방송불가였기에, 하지만 대학가에서는 정부에 대한 저항가요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연출가로서 활동중이다.

80년대는 역사적으로 파란만장한 시대의 서두를 알리는 시기였다. 민주화의 열풍이 확산되어갔고 12.12사건으로 시민들은 초긴장 상태를 이루었으며 정부에 의한 공연이 치러졌다. 대학가에서 흘러나온 저항가요는 각 기업의 노조나 노동자 집회에서도 많이 불러지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라는 대학생 동아리가 결성이 되었다. 이때 신중현은 "아름다운 강산"이라는 대곡을 가지고 재기에 성공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으며 지금도 꾸준하게 곡을 발표하고 있다. 얼마전에는 "가을 나그네"라는 곡을 발표했다.

90년대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3인조 가수가 등장을 하여 가요사를 다시 쓰게끔 하였다.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공전의 히트를 쳤다. 랩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을 하였고 외국 가수들의 내한 공연이 줄을 이었다. 국악과 중견가수들도 활발하게 활동을 한 시기이기도 하다.

요즘은 가수들의 역량은 뒷전이고 외모만을 가지고 립싱크만을 하는 가수들이 많아서 가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뒤지는 가수가 많다. 괴기스러운 복장, 노출이 심한 의상, 염색한 머리 등 정신세계를 허무는 사조의 파행을 알렸다. 세기말 적인 현상이 일어났으며 그에 따른 파급은 무엇일까? 6~70년대의 언플러그드 음악이 새삼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투박한 악기소리와 열심히 열창을 하는 가수들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이런 것이 세대차이일까?! 무더기로 나와서 춤만을 보여주고 립싱 크로 노래하는 가수들은 줄어들고, 진정한 음악을 할 줄 아는 가수들이 많이 배출됐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램이다.


 

  ㅇ 핵심참고자료(단순정리)


 

▶60~70년대◀
(60년대 음악 : 미국 대중가요의 영향)

비틀즈와 미국 팝송, 로큰롤 등이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
주한 미군 계통에서 노래하던 가수가 알려지기 시작 → 윤항기
학사 가수들의 등장 = 최희준, 박형준, 위키 리, 유주용, 김상희, 김수연 등
남녀 보컬그룹의 등장 = 블루벨스, 봉봉4중창단, 쟈니 브러더스 , 김 시스터스
1962년 민간방송국 개국 →전파매체를 통한 대중가요 보급 본격화
65년 한일 정상화 → 엔가풍의 복고조 노래 재등장 = "동백 아가씨"(이미자)

<영국 가수들의 미국 시장 상륙>

팝 음악의 흐름을 되짚어보면 우연찮게도 그 시대의 말쯤에는 늘 커다란 사건들이 벌어지거나 음악적으로 큰 획을 긋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60년대 말에도 어김없이 세기적 음악이슈가 탄생하죠...
1959년 미국의 로큰롤 음악을 가장 백인적인, 그리고 가장 미국적인 대중 음악으로 승화시켜 더욱더 폭넓게 세계에 보급시켰다는 평을 받은 미국 로큰롤 음악의 마지막 보루 버디 홀리(Buddy Holly)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어쩌면 순수 로큰롤 시대를 마감하는 대 사건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미국의 포크 가수 돈 맥글린(Don Mcglean)은 자신의 노래 에서 버디 홀리의 죽음을 가리켜 '미국의 음악도 죽었다'라고 표현했죠.

버디 홀리를 비롯해서 리치 밸런스, 빅 바퍼 등 가장 굵은 로큰롤 스타들을 한꺼번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잃은 미국의 팝 음악계는 6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영국 출신의 그룹 비틀스(The Beatles)를 핵으로 해서 애니멀스, 롤링 스톤스, 더 후 등에 의해 미국의 팝 시장이 완전히 점령되면서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50년대 로큰롤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 땅에 전해지고, 그것을 듣고 자란 40년대에 태어난 영국의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이 떼를 지어 미국 팝 시장을 석권하면서 60년대 (로큰롤 제 2세대)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들 영국 출신의 로큰롤 그룹들이 미국 내에서 끊임없이 히트곡을 내놓으며 수많은 레코드를 팔자 팝 음악계는 갑자기 솔로 가수의 시대에서 그룹의 시대로 변모해갔습니다. 그 결과 로큰롤 음악의 격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작용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팝 세계는 서서히 '록 뮤직(Rock Music)' 시대로 돌입하게 되죠...
그러나 미국 내에서도 '비치 보이스'나 '몽키스' 같은 미국 그룹에 의해 새로운 음악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는 50년대 초부터 시작한 산레모 가요제가 세계적인 관심을 모아 60년대에는 칸초네의 인기가 가히 세계적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 흘러 들어온 로큰롤의 영향으로 자니 알리데이, 미셸 폴라레프, 실비 바르탕 같은 신세대 샹송 가수들이 록 적인 비트를 가미한 프렌치 팝(French Pop)의 기수로 등장,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습니다.
6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미국 내에서는 소위 아메리칸 모던 포크송의 인기가 최고조로 달했는데, 킹스턴 트리오, 피터 폴 앤 매리, 브라더스 포, 사이먼 앤 가펑클, 버즈, 마마스 앤 파파스, 그리고 밥 딜런, 존 바에즈 같은 포크 음악계의 스타들이 대거 출현해, 통키타와 청바지를 내세운 새로운 청년 문화를 이끌었습니다.
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히피 붐과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출현이었다. 자유와 평화를 표방하며 허례 허식을 집어던지자고 외쳤던 히피이즘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이색적이면서도 아주 중요한 문화 현상이었습니다.
팝 음악 역시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된 이 히피 붐과 함께 나온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타고 서서히 70년대 록 뮤직 시대를 열어 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 60년대 말의 분위기였다.

60년대 말에는 팝 음악계의 중요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는데, 특히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뉴욕주 우드스톡(Woodstock)에서 벌어진 록 음악 페스티벌이 대표적이며 깨지지 않는 신화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반전, 사랑과 평화, 공동체와 약물, 그리고 록 음악이 전부인 히피들의 마지막 낙원이었습니다. 또한 6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의 총 결산이죠.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대중음악의 주요 장르들이 모두 60년대에 생겨나거나 개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60년대는 파격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대였으며, 이상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시대였다는 점, 그리고 기존 체제에서 억압받던 자들에 의한 저항의 시대였기 때문이죠!

 

(70년대의 청년문화와 대중가요)

이탈리아의 칸초네에서 미국의 팝송, 컨트리송,하드록 등이 젊은 세대를 열광시킴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시대 → 외국가요의 전성기
살롱뮤직의 전성시대 → 신시사이저(synthesizer)음악 시작
대중가요가 매스컴의 각광을 받음
→ 젊은 송 라이터들 출현
=> 송창식, 윤형주, 박인희, 이필원, 양희은, 김민기, 조영남 등의 시대
-> 산업화, 대도시화에 대한 저항의 노래 시작
베트남전쟁을 전후해서 동남아시아와 멀리 유럽이나 미국 등지로
유능한 가수들 해외진출= 패티 김, 윤복희, 이연옥, 곽순옥, 김성옥, 로라 성 등
한국 대중음악의 국제화 = 70년에 도쿄[東京] 세계가요제 입상
->《안개》(이봉조 곡, 정훈희 노래) 이후, 계속해서 그리스·칠레 등에 한국가요의 진출.
-> 대표적인 작곡가 = 이봉조, 길옥윤, 김강섭, 김기웅, 정민섭 등이 활약
_> 박경희, 정미조, 김상희, 혜은이 등이 입상
78년부터 서울에서 개최하는 국제가요제, 세계가요제 등은
세계 각국에서 16개국 이상이 참가하는 연례행사로까지 발전
77년 이후 광복 30여 년 만에 한국가요의 일본 상륙 등 새로운 양상
-> 이성애, 이미자, 김연자, 허영란, 남상규, 문주란, 정재은, 남진, 나훈아 등
의 레코드 매출이 큰 성공을 거둠

70년대 들어면서 부터 더 유명한 노래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퀸의등장.. 비지스,아바, 섹스 피스톤스,이글스 등..
퀸 유명한 노래는 We are the champions
보헤미안 랩소디, We Well Rork You, Too Much Love Will Kill You 가 있죠..;;
그리구.. 비지스의 노래
How Deep is your love
Hoilday (인정사정 볼것 없다 의 OST죠..)
아바 노래는
우선 댄싱 퀸은 기본이고요..;; Honey Honey ,I Have a Dream,Chiquitita 등이 있겠구요..
카펜터스의 Top of the world두 있구요..

8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 많은 음악들이 공존했던 바람직한 시대였고, 라이브의 강자들이 방송출연을 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놀라운(?) 시기이기도 했다.
김현식, 들국화, 한영애, 봄여름가을겨울, 동물원 등이 TV를 통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었음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 80년대 유행곡 입니다. ]
조정현-그아픔까지 사랑한거야
이문세-광화문 연가
김현식-비처럼 음악처럼
김동환-묻어버린 아픔
안치환-사랑하게 되면, 내가 만일
이선희-J에게
박미경-민들레홀씨되어

그리고..80년대는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을 빼놓고는 팝음악을 말할수가 없겠죠..

80년대는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 이 나왔죠.. 60년대 음악과 음악 배경 같은 것이 다른것을 알수있죠..

마이클 잭슨의 유명한 엘범 'Thriller' 앨범 37주간 빌보드 차트 1위 및 5000만장 판매하며 팝 음악의 황제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Beat it,Billie Jean .. 대단하죠

마돈나는.. Like A Virgin 으로 유명하죠..


90년대의 우리나라 가요는 서태지의 등장으로 인해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국내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장 활동을 많이했으며 인기도 최고였었죠.

그때는 서태지 열풍이 불어서 모두들 콘서트장에서도 더 앞에서 볼려고 하다가 사람들 많이 발에 깔려 죽은일도 있었으며 해체 한다는 소식에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죠..

공일오비, 솔리드, 모노.. 도 그때 한창 인기 절정이였습니다.


90년대 초반 들어서 신승훈, 이승환이 등장했다.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많은 연예인들이 사라진 지금 그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발라드의 황제, 왕자 등으로 불리면서 말이다. 또 그 뒤에 등장한 김건모. 김건모는 '핑계' '잘못된 만남' 등의 앨범을 통해 국내 음반판매에 있어서 새로운 기록들을 습니다.

 

작곡가 김기범

 

 

 

1973~1975년 포크 음악

 

그룹 사운드 출신들, '포크 싱어'들과 만나고 또 헤어지다(상): 1969-1972

 
 

최지선 fust@nownuri.net |

 

포크, 소울·싸이키에 '도전'하여 '각축'을 벌이다?

세시봉. 한국 포크 혹은 통기타 음악의 요람(사진제공: www.windbird.pe.kr 여운택님)

1970년대 전반기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청년의 취향을 대변한 음악이 대체로 '포크'라고 불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일단 '음반'의 측면에서 살펴 보자. 1970년 송창식과 윤형주로 구성된 트윈 폴리오의 독집 음반이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이들은 아쉽게도 음반 발표 직후 해산되었지만, 1971-3년 경에는 김세환, 김민기, 서유석, 이장희 등의 남성 솔로 가수, 양희은, 은희, 이연실 등의 여성 솔로 가수, 뚜아 에 무아, 라나 에 로스포, 원 플러스 원 등의 혼성 듀엣, 쉐그린, 4월과 5월, 어니언스 같은 남성 듀엣의 음반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물론 송창식과 윤형주도 솔로 가수의 경력을 이어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포크는 소리 소문 없이 대중음악계에서 자신의 지분을 넓혀갔다. 급기야 1973년 말 - 1974년 초 이장희의 3집 음반("그건 너" 등 수록)과 어니언스의 첫 독집 음반("편지" 등 수록) 등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포크는 단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일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좋아하는 음악', 즉 '잘 팔리기도 하는 음악'이 되었다. 주)

이장희 - 그건 너(1973) 
어니언스 - 편지(1974) 

주) 여기서 '한국 포크'라는 용어에 대한 논란은 깊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포크라는 용어의 '한국식 전용'에 대해서는 최근 송창식이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적확하게 진단한 것을 인용하면서 설명을 대신한다. 간단히 말해서 '포크'란 'folk'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번안'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 포크의 본격적 출발이 '번안곡'이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다소 과도한 비유일지 몰라도 '가든'이 'garden'과 다르고, '빌라'가 'villa'가 다른 것처럼 '포크'는 'folk'와 다르다. 따라서 '포크'라는 말이 혼동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반화되어 사용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도 당분간은 이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겠다. 노파심에서 첨언하면 우리도 '한국 포크'는 '영미 (모던) 포크'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설명은 너무 소략할 뿐더러 '현장'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극히 불충분하다. 1963년 이래 무교동과 명동에 소재한 세시봉, 디쉐네, 심지다방(오비스 캐빈의 전신), 금수강산 같은 '음악감상실'의 간이 무대에서 연주되던 시기를 빼놓는다면 '알맹이'도 없는 설명이다. 이들 음악감상실에서 어쿠스틱 기타 한두 대와 함께 연주하는 노래 소리는 당시로서는 더없이 매혹적이었다고 기록된다. 화음을 맞추어 듀엣으로 청아한 노래를 부른 트윈 폴리오(송창식과 윤형주), 장발을 휘날리면서 자유분방하게 자작곡을 불렀던 한대수, '음치'에 가까운 목소리지만 진실된 감정을 외쳐대던 이장희, 털털한 목소리로 사회풍자의 메시지를 전달한 서유석, 구전민요를 발굴하고 '프로테스트 포크'를 번안해서 부른 양병집(누락한 분들게 사죄를 표한다) 등이 당시 '청년문화의 주역'이었고, 이들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면서 '공동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임을 만들어 나갔다는 사실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책으로 한 권 정도는 써야 조금이나마 만족스러울 것이다. 1970년부터 1971년 여기저기서 열렸던 '포크 페스티벌'들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1973년 이후의 현상은 더 복잡하고 광범해서 개별 인물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포크 음반은 봇물처럼 쏟아졌고, 개중에는 독집 음반뿐만 아니라 '영 패밀리', '영 페스티벌',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 '골든 포크 앨범', '국내 6대 포크 싱어들의 대향연' 등의 이름을 단 컴필레이션 시리즈도 소장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대중음악으로서의 포크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건은 솔로 경력을 걸어 가던 가던 송창식이 "피리 부는 사나이", "한번쯤", "왜 불러"를 통해 1975년 MBC TV의 '가수왕'으로 선정되면서 '국민가수'급으로 부상한 사건일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에는 '진짜 포크냐 아니냐'라는 식의 논란이 있다. 그렇지만 '통기타 포크'로 출발한 음악과 음악인이 대중음악계를 평정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비슷한 시점인 1975년 12월 이른바 '대마초 사건'으로 이상의 모든 과정이 무효화되었다는 또하나의 사실도 있다.

송창식 - 한번쯤(1974) 
송창식 - 왜 불러(1975) 

그건 그렇고...그룹 사운드를 중심으로 1960-70년대 록 음악의 전개를 다루는 이 시리즈에서 왜 '포크'를 다루는 것인지 의아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맞다. 한국에서 포크는 록이 아니고, 록은 포크가 아니다. 그러니 '포크 따로, 록 따로' 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이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한국의 포크와 무관하지 않은 스타일의 음악이 '록 음악'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아내고 항의해 보았자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된 관행을 거스르기는 힘들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접근할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 위에서 '아니다'라는 표현을 '다르다'로 바꿔 보기로 하자. 한국에서 포크와 록은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다른 것일까.

먼저 '씬(scene)'이 다르다. 1960년대까지 한국의 '그룹 사운드'는 미 8군 무대의 '쇼단'과 기지촌 클럽의 '하우스 밴드'에 젖줄을 대고 있었던 반면, '포크송'(당시의 표기법으로는 '폭송' 혹은 '훡송')은 서울의 도심, 이른바 '다운타운'의 음악감상실의 간이 무대가 자신의 요람이었다. 그래서 종종 그룹 사운드와 포크송 가수는 '출신 성분'이나 인맥이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 조금 더 경직되게 사고한다면, 포크송은 한국 문화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것인 반면, 그룹 사운드는 미국 문화(심지어 '미군 문화')로부터 간접적으로 파생된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악기'와 '편곡'이 다르다. 주지하듯 포크송은 어쿠스틱 기타와 불가분하고, 그룹 사운드는 전기 기타(통 없는 기타)와 불가분하다. 실제로 이런 차이는 두 장르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다. 어쿠스틱 기타의 소리는 '통을 울리는 맑은 소리'인 반면, 전기 기타의 소리는 '전기증폭을 통한 찌그러진 울림.... 인위적이고 금속적인 느낌'이라는 대비가 그것이다(이영미(1998), [한국 대중가요사], p. 264).

세 번째로 포크송 가수들은 스스로 곡을 만들어서 부르는 '자작곡 가수(싱어송라이터)'의 지향이 강했던 반면, 그룹 사운드는 외국 곡을 커버(혹은 카피)하고 모방하고 자작곡을 만드려는 의지가 상대적으로 희박했다는 차이도 종종 거론된다. 일부의 편견이겠지만 그룹 사운드 멤버들은 '양아치'인 반면, 포크송 가수는 '지성인'이라는 이상한 이분법을 가진 경우도 있고, 거기에 학벌주의까지 가세하여 이분법을 강화하기도 한다. '명문고, 명문대...' 운운하는 견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들은 '팩트'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방금 지적한 점들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서 '팩트'를 확인해 보자. 1970년대 초까지는 포크송도 그룹 사운드도 팝송을 번안한 것 중심이었고, 창작곡이라고 하더라도 자작곡인 경우는 많지 않았다. 또한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 모두 기타 연주가 중심이라는 점에서 관현악과 '전자 올갠' 중심의 '경음악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과 달랐다. 즉,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 사이의 차이는, 양자들 더한 음악과 다른 음악(대체로 트로트와 신민요) 사이의 차이에 비한다면 훨씬 작았다. 한국의 포크송 가수들이 일렉트릭 기타를 의도적으로 터부시하여 음반과 공연에 사용하려고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룹 사운드가 어쿠스틱 기타를 '시시하다'고 생각하여 손 대지 않으려고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출신성분과 인맥은? 이 점도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광의의' 포크 계열로 간주되는 인물들 중 조영남, 이필원, 김도향, 조동진, 임창제, 전언수, 이태원, 오세은 등은 미 8군 무대와 연관된 씬에서 그룹의 멤버로 음악 경력을 시작한 인물이다. 이들의 그룹 사운드 경력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들이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보면, 이필원은 미 8군 무대 등지에서 코멧츠, 타이거스, 미도파스 등의 멤버로 활동했고 1969년 '플레이보이배 쟁탈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 타이거스를 이끌고 "미련"으로 출전해 가수상을 수상했고(참고로 1970년에는 연석원, 1971년에는 조용필(!)이 각각 가수왕을 수상했다), 전언수와 이태원은 '소울 가수'로 불리던 황규현 그리고 조동진 등과 함께 5인조 그룹 더 셰그린에서 활동하다가 뒤에는 미도파스에서 이필원과 함께 있었고, 오세은 역시 메가톤스와 영 바이블스라는 그룹을 이끌고 이태원의 미군 클럽에서 그룹 사운드 경력을 쌓았고 등등.... 이들이 미 8군 무대에서 연주했던 사실을 숨기거나 그때 일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아직 보지 못했다.

차중광 - 내 사랑아(이필원 작곡 및 기타 연주)(1969) 
메가톤스 - 징글벨(1971) 

한편 1970년대 초 결성된 신예 그룹 사운드의 경우는 미 8군 무대를 거치기는 했어도 1960년대부터 경력을 시작한 선배들에 비하면 기간도 상대적으로 짧았고 '고생'한 정도도 작았다. 한 예로 장계현은 [주간경향]이 주최한 '전국 아마추어 포크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뒤(2등은 홍민, 3등은 유승엽이었다고 한다) 그룹 사운드 템페스트의 보컬로 가담한 경우다. 한편 1970년대 중반 대표적인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이자 동방의 빛을 이끈 강근식의 경우는 미 8군 무대와 연관된 그룹 사운드를 거치지 않았지만 '한두 다리만 건너면' 미 8군 출신의 음악인들과 연결된다(이때 '한두 다리'는 그의 대학교 후배들인 히 식스의 조용남 그리고 방금 언급한 템페스트의 장계현이다. '홍익 캄보'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할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 초 포크로 분류되는 음악인들과 그룹 사운드로 분류되는 음악인들 사이에 이렇게 칼로 무 자르는 식의 구분은 미약하다. 방금 언급한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는 현재 우리가 포크로 분류하는 음악인들과 그룹 사운드로 분류하는 음악인들이 같은 무대에 섰다. 1971년의 청평 페스티벌이나 그 뒤의 남이섬 송 페스티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우리들 모두 음악 동료였어요"라는 김홍탁의 언급이나,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의 구분은 "그게 잘못이죠. 그건 참 잘못이에요"라는 신중현의 언급을 '유도심문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조심스럽게 이런 결론을 내려 볼 수 있다. 포크와 록(그때 용어로 '사이키')은 서로 다른 씬을 형성한 것은 사실이라도 양자 사이에 '대립'같은 것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음악을 직접 만들고 연주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포크와 록 사이의 이분법은 미디어에서 표상된 모습이나 수용자의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포크와 록의 두 진영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한데 어우러져 지냈다는 증언과는 달리 미디어의 보도는 두 진영을 의식적으로 구분하려는 모습이 관찰된다. 지난 호에도 이와 관련된 몇 개의 기사를 언급했지만 하나만 더 언급해 보자. 1970년 9월 4일부터 서울 시민회관에서 4일간 열리는 '후트네니 고고고'라는 페스티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주간경향]의 그해 9월 9일자 기사다. 기사의 내용은 편향되어 있지 않다.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 이 행사는 포크 음악을 주된 초점으로 하고 있고, 기사는 '포크 뮤직의 토착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포크 제전"이라는 이 행사에는 신중현과 퀘스쳔스와 박인수, 김추자, 히 식스, 쥰 시스터즈, 데블스, 연석원, 라스트 챤스 등 그룹 사운드 계열도 참가한다고 보도하고 있고 이들은 "전자 사운드로 이지 리스닝 계열과 각축을 벌일 것이다"라고 써 있다. 이지 리스닝이란 무엇일까? 기사 말미에는 포크를 "시정 있으며 미국 대학가에서도 가장 격 높은 유행 음악 형태로 알려진 포크 뮤직을 중심으로 한 이지 리스닝 계열"이라고 밝혀져 있다. 포크를 '이지 리스닝'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나 (포크와 소울·싸이키의) "각축"이라는 표현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점도 기사의 제목에 비하면 완곡한 편이다. 커다란 글씨로 쓰인 기사 제목이 "소울·싸이키에 도전하는 포크 뮤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데스크에서 정한 제목이리라...

[주간경향] 1970. 9. 9. 기사. 한국 최초의 포크 제전이라는 '후트네니 고고고'에 대한 기사

이제 이 글의 의도를 밝혀야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자생적이고 공동체적인 음악적·문화적 실천으로서의 포크가 아니라 '직업적 대중음악의 하나로서 포크'다. 포크가 '대중음악'으로 부상하면서 방송 출연이나 음반 제작 같은 직업적 음악인의 실천과 만나는 양상이 우리의 관심이다. 즉, 음반을 제작하고 공연을 하면서 보다 많은 '대중'과 만나면서 아마추어로 출발한 '포크 싱어'(혹은 포크송 가수)와 그룹 사운드 출신의 직업적 음악인과의 만남은 불가피했고 그 과정에서 복잡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 이 글을 쓰기 직전 내린 우리의 잠정적 결론이다.

여기서 '그룹 사운드 출신'이란 대체로 미 8군 무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씬에서 연주인으로 경력을 다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하의 글들은 '가수'가 아니라 작곡자, 편곡자, 연주인에 촛점을 둘 것이고, 노래를 부른 사람이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거나 배치(arrangement)한 사람에 촛점을 둘 것이다. 물론 포크 씬이나 포크 가수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즉, 이 글은 포크의 정사(正史)가 아니라 하나의 비전(秘典)이다. 주)

주) '포크'의 전개에 대해서는 김형찬의 학위논문 [한국 초기 통기타 음악의 사적 연구: 1975년까지 사회사적 흐름과 작가를 중심으로](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2002.2)를 참고하라. 이 논문은 한마디로 '놀랍다'. 이 논문의 완본(完本)은 내년 중 발표될 예정이라고 한다. 단, 여기서 그는 '포크'라는 용어의 모호성을 지적하면서 '통기타 음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직업적 작편곡가, 아마추어 포크 가수들과 만나다: 김인배, 홍현걸 그리고 또...

먼저 1969년부터 1971년 사이에 발표된 대표적 포크 음반을 들어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는 이 기간 동안 어떤 변화가 발생했는가를 추적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골라 본 네 종의 음반은 다음과 같다. 물론 이는 '샘플'로 골라본 것일 뿐이며 정확한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1) 트윈 폴리오·펄 시스터즈 외 [아이 러브 유(I Love You)](지구, JL 120329, 1969. 6.)
2) 트윈 폴리오 [축제의 밤/고별: 트윈 폴리오 리싸이틀](지구, JLS 120372, 1970.1)
3) 뚜아 에 무아 [뚜아 에 무아 히트 앨범 제 1집] (그랜드, GH-00004, 1970.7)
(및 뚜아 에 무아 [뚜아 에 무아 히트 앨범 제 2집] (그랜드, GH-00014, 1971.8))
4) 양희은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유니버어살, KLS-26, 1971.9)
5) 김민기 [아하 누가 그렇게/길] (대도, EU-716, 1971.10)

트윈 폴리오·펄 시스터즈 외 [아이 러브 유(I Love You)]에 실린 김인배의 사진

1)의 음반은 트윈 폴리오의 독집이 아니라 펄 시스터즈 등과 함께 섞인 '옴니버스 음반'이다. 그런데 트윈 폴리오와 펄 시스터즈는 지금 생각으로는 짝이 잘 맞지 않아 보인다. 그룹의 구성으로는 동성(同性)으로 이루어진 듀엣이라는 점이 공통적일 뿐 음악 스타일이나 가창 방법 등의 차이는 음반을 함께 낼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눈에 띄는 글귀는 '김인배 작편곡집'이라는 음반의 부제다. 김인배는 트럼펫 연주자로서 미 8군 무대에서의 경력을 거쳐 KBS 악단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렇게 직업적 연주인이자 작편곡가가 음반 제작을 총괄하는 시스템(당시의 작편곡가는 요즘의 '제작자'와 비슷한 역할을 겸했다)은 초기 포크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트윈 폴리오가 연주한 곡은 번안곡 다섯 곡과 김인배의 곡 하나이고, 편곡은 어쿠스틱 기타 두 개의 합주 외에 별달리 추가한 악기는 없다.

펄 시스터즈 - I Love You(1969) 
트윈 폴리오 - 떠나야 할 그 사람(1969) 
트윈 폴리오 - 축제의 노래(1970) 

2)의 음반은 트윈 폴리오의 독집으로 '홍현걸 편곡'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수록곡은 위 음반과 비슷하게 모두 번안곡이다(실제로는 송창식이 세 곡의 번안에 참여했지만 음반 표지 뒷면에는 '조영호'의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는 송창식이 '작사가 연합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영호라는 표기도 '조용호'의 오기다. 그는 TBC 프로그램 [쇼 쇼 쇼]의 명 PD였다). 편곡의 경우 "축제의 노래"의 경우는 글로켄스필, 현악, 드럼 등 어쿠스틱 기타 이외의 악기가 추가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어쿠스틱 기타 두 개의 합주 중심이다. 말하자면 이 음반은 1)의 음반을 통해 트윈 폴리오라는 이름이 유명해지자 독집 앨범이라는 포맷으로 음반의 일관성을 부여해 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1)과 2)의 음반이 지구 레코드라는 '메이저'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이저에서 제작한 음반이라는 특징과 '아무개 작편곡집(혹은 작품집)'이라는 특징은 불가분해 보인다. 실제로 이들 음반에서 김인배와 홍현걸이 실질적으로 수행한 역할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두 작곡가는 이 음반들 외에도 포크 가수들의 음반에 관여하지만 이런 특징은 비슷하다. 지구 레코드와 더불어 1970년대 한국 음반산업을 양분하다시피 한 오아시스 레코드가 관여한 것도 대체로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한편 1년 반 정도 시간이 경과한 뒤에 발표된 3)의 음반은 새로운 단계를 보여준다. 이필원과 박인희의 혼성 듀엣인 뚜아 에 무아는 1970년 여름 독집 음반 [스카브로우의 추억/약속](GH-00004, 1970.7.4.)을 발매하고 여기서 "약속"이 히트하면서 일약 대중 스타로 도약한다. 그리고 위에 적은 앨범은 이 앨범의 후속탄이다. 주목할 것은 이 음반들을 발매한 곳이 그랜드 레코드라는 '군소' 프로덕션이고, 이곳의 실력자가 황우루라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지난 번 글에서 히 식스에 관한 리뷰를 상세히 읽었다면 히 식스의 음반이 '그랜드 레코드'라는 레이블을 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즉, 그랜드는 그룹 사운드 쪽으로는 히 식스(He 6), 통기타 포크 계열로는 뚜아 에 무아를 각각 간판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렇듯 이 음반은 '메이저'가 아닌 곳에서 청년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음반으로 제작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더욱 중요한 것은 자작곡들인 "약속", "그리운 사람끼리", "발자욱"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1971년 말 뚜아 에 무아가 해산되고, 히 식스도 1972년에 오아시스로 이적하면서 그랜드 레코드는 그 뒤로 이렇다 할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뚜아 에 무아 - 약속(1970) 

4)의 음반은 음반의 주인공이 여성 솔로라는 점을 제외하면 3)의 음반과 비슷하다. 양희은의 데뷔 음반인 이 음반에 수록된 총 10곡 중 7곡이 번안곡이다. 그렇지만 김민기의 곡이 둘("아침 이슬", "그 날"), 김광희의 곡이 하나("세노야") 수록되어 있는 창작곡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창작곡은 시험삼아 수록한 것이 아니라 음반에서 가장 중요한 트랙들이다. 편곡은 김민기의 어쿠스틱 기타와 이용복의 12현 기타(역시 어쿠스틱 기타지만) 두 대의 합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무개 작품집'이라는 부제가 없다는 점, 그리고 음반사가 '유니버어살'이라는 점이다. 유니버어살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실질적으로는 킹'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맞다. 이 음반의 제작자는 '킹박'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킹 레코드(혹은 킹 프로덕션)의 사장 박성배로서 양희은이 이후 발매하는 모든 음반의 제작을 맡게 되는 사람이다. 음반에서 킹 레코드의 이름은 KLS로 시작하는 일련번호에만 암시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렇지만 '신중현 사단'과 밀접한 인물로 '소울 사이키'의 폭발에 기여한 그가 '통기타 포크'의 재탄생에도 깊게 관여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5)의 음반에 이르면 3)과 4)의 음반이 가지고 있는 과도적 성격마저 넘어서게 된다. 다름 아니라 음반의 주인공인 김민기가 '포크 싱어송라이터'라는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열 개의 트랙 대부분이 그의 자작곡이며 한 곡은 번안곡("저 부는 바람")이며 다른 한 곡은 한대수의 곡("바람과 나")이다. 양희은과 뚜아 에 무아에 남아 있던 영어 가사는 사라졌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 음반이 문자 그대로 '독립 제작'이라는 점이다. 음반사가 한 역할은 마스터 테이프를 프레싱하는 임가공 외에는 없었으며 나아가 킹이나 그랜드 같은 프로덕션조차도 없다. 김진성과 최경식이라는 방송국 PD들이 제작을 맡은 이 음반은 '개인 제작자'가 메이저 음반사를 거치지 않고 제작한 음반이고, 그런 의미에서 '독립 제작'된 음반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사·작곡이나 제작 면에서의 가치 외에 이 음반이 가지는 가치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악기편성과 편곡이다. 이 음반에는 '통기타'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오르간, 베이스, 플루트, 드럼이 등장한다. "아침이슬"에는 현악 편곡도 등장하는데 이것도 기성의 '악단'의 편곡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앞의 트윈 폴리오의 음반이 '아무개 작품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자와 편곡자가 한 일은 별로 없어 보이는 반면 이 음반에서 연주인은 분명히 '무언가'를 했다.

김민기 - 친구(1971) 
김민기 - 아하 누가 그렇게(1971) 

연주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잠시 뒤에 보기로 하자. 이런 점에서 이 음반은 한국 포크를 정초한 음반이 아니라 한국 포크를 새로운 단계로 이행시킨 작품이다. 즉, 포크를 통기타 순수주의로부터 '해방'시킨 음반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작곡가이자 가수였던 김민기의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열려 젖혀진 다음 '한국 포크' 앞에는 김민기 노래 가사처럼 "여러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이 길 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길들이.... 이 글에서는 그 길들 중 첫 번째 길을 보도록 하자.

주) 김민기는 양희은의 데뷔 음반에 기타 연주자로 참여하기 이전 1970년 말에 음반 데뷔를 한다. 지금 보기에 의아한 것은 그의 경우조차 김인배의 이름을 대동하는데, 이 음반은 다름 아니라 [김인배 크리스마스 캐롤집](대도, 1970.12.1)으로 이 음반은 한국의 음반 수집가들에게는 공공연한 비사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음반에는 도비두라는 이름으로 자작곡인 "친구"와 "세노야", 그리고 크리스마스 캐롤인 "첫번 크리스마스(The First Noel)"가 수록되어 있다. 도비두는 김민기가 김영세와 결성한 듀엣으로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이다. 그 이전에 참여한 레코딩이 있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한편 김민기의 독집이 '독립 제작'이라는 방식을 취했던 것은 당시 메이저 음반사인 신세기에서 거절당했다는 루머도 전해지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스포츠신문식 가십'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도비두 - 친구(1970) 
도비두 - 세노야(1970) 
김민기·조영남- 작은 별(1972) 

킹 프로덕션, '폭송'에도 손길을 뻗치다(1): 신중현의 경우

한국 음악산업의 역사에서 킹 레코드의 사장 '킹박' 박성배의 역할은 지대하다 못해 결정적이기까지 하다. 그에 의해 '물건'으로 지목되면 곧 히트로 이어졌다. 1960년대 말 ~ 1970년대 초 김추자, 펄 시스터즈 등 '신중현 사단'의 가수들이 그의 손을 거쳐 나왔고 조용필과 이문세까지도 그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은 언젠가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양희은의 모든 음반을 박성배가 제작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킹박의 손길이 '포크'에까지 미친 것은 꽤 오래 된 일이다.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KLS 27)의 표지 앞면

우선 1971년 가을 '킹'의 이름을 달고 제작된 두 종의 컴필레이션 음반을 살펴 보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자. 1971년 9월 1일자로 발매된 [71 킹 힛트 앨범 1집](유니버어살, KLS-25)과 1971년 10월 25일자로 나온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유니버어살, KLS-27)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71 킹 힛트 앨범 1집]은 우리가 '신중현 사단'으로 알고 있는 가수나 그룹의 히트곡을 모은 것이라서 별로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두 번째 음반은 다소 낯설다. 일단 표지가 낯설다. 서양 남자와 여자 두 명이 통기타를 들고 있는데, 앞의 음반에 김추자가 등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이국적'이다. 마치 당시 유행하던 '빽판', 그러니까 '오리지널 히트 팝송 모음집'같은 표지다('빽판' 가운데 원판을 그대로 찍어낸 것이 아니라 편집을 거친 경우는 컬러 표지가 종종 있었다).

이 앨범 수록곡들 각각을 상세히 조사하면 기발표곡과 미발표곡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히트곡을 사후에 편집한 음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록된 음악들은 '킹'이나 '신중현'이 풍기는 이미지와는 다르다. 트리오 하파니스라는 정체불명의 그룹이 "사랑해"와 "꽃반지 끼고"같은 한국의 '폭송'을 부르면서 음반이 시작되기 때문이다(이들에 대한 언급은 앞서 인용했던 [주간경향]의 1970년 9월 9일자 기사 "소울·싸이키에 도전하는 포크 뮤직"에 기록되어 있다. 단, 후문에 의하면 이들은 멕시코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온 그룹이라고 한다). 다른 '폭송 가수'의 이름을 수록된 순서대로 나열하면 양희은, 신중현, 서유석, 쉐그린, 트윈 폴리오다. 나머지는 그렇다 치고 신중현은 여기 왜 들어가 있을까? 그것도 작편곡자나 연주자가 아니라 '가수'로... 이런 의문은 잠시 거두자.

트윈 폴리오 - 떠나야 할 그 사람(1969/1971) 
양희은 - 나뭇잎이 떨어져서(1971) 

어쨌든 이 앨범에 이름을 올린 면면들은 당시 포크 가수들과 킹 프로덕션 사이에 모종의 '인맥'이 형성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그 결과 의외의 트랙들을 들을 수 있는데, 이는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의 경우 김추자가 불러서 유명해진 "나뭇잎이 떨어져서"를 양희은이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고 있고, 펄 시스터즈가 불러서 유명해진 "떠나야할 그 사람"을 트윈 폴리오가 드럼 비트와 현악 섹션이 더해진 버전으로 부르고 있다. 두 번째 경우로 눈에 띄는 곡들은 쉐그린이라는 포크 듀엣이 부른 "철새는 날아가고", "침묵의 소리"이다. 이 경우는 당시 포크 가수들이 즐겨 부르던 사이먼 앤 가펑클의 번안곡이라는 점에서는 포크 음반의 수록곡의 전례와 크게 어긋나는 것 같지 않지만 사운드 면에서는 통상적인 '통기타 포크'와 다르게 다가온다. 포크 치고는 강한 록 비트도 그렇지만, 현란하고 싸이키델릭한 플루트가 불현듯 끼여드는 것도 이색(혹은 이질)적이다. 이 중에서 두 번째 경우는 조금 뒤에 살펴 보고 우선 첫 번째 경우에 집중해 보자.

우선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에서 주목되는 첫 번째 사례들을 살펴보자. "나뭇잎이 떨어져서"와 "떠나야 할 그 사람"은 신중현의 곡인데, 문제는 이 노래들을 포크 가수가 불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울·싸이키'의 작곡가이자 연주인인 신중현과 포크 가수들의 만남이다. 이것이 단지 작곡가가 가수에게 곡을 주어 노래를 취입하게 하는 일반적 관행의 산물인지 아니면 더욱 긴밀한 무언가가 존재하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앞서 트윈 폴리오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김인배 작편곡집 [아이 러브 유]에서 펄 시스터즈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은 희미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포크와 그룹 사운드 혹은 그와 관련된 인사들이 서로 무관심하기만 한 사이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푸른 사과]: 이 영화는 김응천 감독의 1968년 영화로 주연은 남진, 최영희, 조영남이 맡았으며 이들은 사운드트랙 음반에서 노래도 불렀다.

하지만 이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그렇지만 신중현이 포크가 대중음악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던 시점부터 포크과 교류했다는 확실한 '물증'이 존재한다.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이 발매된 시점보다 2년 정도 앞선 1968년 12월에 영화 [푸른 사과]의 음악 감독을 맡아서 자신의 밴드 덩키스를 이끌고 참여했고 그 결과를 사운드트랙 음반(신향, DG 1023)으로도 발매했다. 이 영화음악의 몇몇 곡은 어쿠스틱 기타 반주의 포크지만 몇몇 곡은 신중현의 '소울·사이키' 가요가 구현된 곡들이다. 그중에 트윈 폴리오가 부른 "떠나야할 그 사람"이 이미 있으니,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에서 수록된 사실을 두고 놀랄 필요가 없다. 게다가, 지난 호 [weiv]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신중현이 다른 그룹 사운드는 다소 폄하하는 반면, 포크 가수는 우대하는 발언을 했다는 걸 기억한다면, 포크 가수가 신중현의 곡을 부르는 일을 낯설어 할 이유가 없다. 지금 보기에 기이해 보이는 만남에도 이미 나름의 '역사'가 있었던 셈이다.

서유석의 '신중현 작편곡집' 음반 뒷표지에 실려 있는 신중현과 서유석의 녹음실 사진

그런데 이는 혹시 작곡가들이 자신이 만든 곡을 여러 가수에게 부르게 했던 당시의 관행의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작곡가 신중현과 포크 가수'의 관계는 그것 이상으로 보인다. 이렇게 단발성으로 포크 가수들과 관계를 맺어온 신중현은 김추자, 김정미, 장현을 거느리고 '소울·사이키' 가요를 주조해 내던 정점기에 포크 가수들과의 '외도'를 단행한다. 포크 가수의 음반에 신중현의 곡이 한두곡 수록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포크 가수들의 독집 앨범에 '신중현 작품집'이라는 부제를 달게 한 것이다. 양희은, 서유석, 조영남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들의 음반이 발표된 1972-73년경이 신중현의 포크에 대한 관심이 가장 집약된 시기로 보인다.

김정미 - 바람(1972) 
김정미 - 고독한 마음(1972) 
서유석 - 선녀(1972) 
서유석 - 나는 너를(1972) 
양희은 - 당신의 꿈(1973) 
양희은 - 나도 몰래(1973) 
조영남 - 징글벨(1970?)(연주: 신중현 악단) 

여기서는 양희은과 서유석의 음반에 주목해 보자(조영남의 음반은 크리스마스 캐롤 음반에 신중현의 악단이 반주를 해준 것이므로 제외한다). 이 두 종의 신중현 작편곡집은 킹 프로덕션에서 제작된 것이 분명하다. 일련 번호를 보아도 양희은의 [당신의 꿈/나도 몰래]는 KLS-56, 서유석의 [선녀/나는 너를]은 KLS-57로 하나 차이다. 이 음반들은 신중현의 작품에 깊이 관여해 온 킹박이 '포크도 장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결과일 뿐일까. 그리고 신중현의 시도가 음악적으로 성공적인 것이었을까. 이에 대한 평가는 두 번째 경우를 살펴본 다음에 내리기로 하자.

정성조가 플루트를 연주하는 장면(사운드트랙 [겨울여자]에서)

킹 프로덕션, '폭송'에도 손길을 뻗치다(2): 정성조의 경우

[71 폭송 히트모음 제1집]에서 수록된 쉐그린의 노래 "철새는 날아가고", "침묵의 소리"로 돌아가 보자. 이 곡들에서 드럼과 베이스 등 록 밴드 편성의 악기가 등장하고, 플루트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포크 가요'의 음악 어법으로부터는 크게 벗어나고 있다. 쉐그린의 음악이 이 음반 이후 통기타 중심적으로 가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포크 가요'의 어법에서 벗어나는 편곡은 의외다.

그 낯선 플루트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현재 KBS 관현악 단장이자 재즈계의 거물인 정성조다. 그렇다면 이제 1971-2년경 정성조가 개입한 중요한 포크 음반들을 거론해 볼 차례다. 앞서 말한 쉐그린의 두 노래들은 [최신 앨범 vol.1: 사랑해요 당신을/동물농장](유니버어살, KLS-14, 1971.4.25)에서 추출된 것이다. 이 음반 역시 당연히 킹에서 나온 것이다. 이 음반에도 신중현의 곡이 두 곡 있는데 1971년 무렵이면 신중현과 정성조 사이에는 이미 음악적 교류가 있었으므로 신중현의 곡을 삽입하는 일은 자연스럽다.주)그렇지만 이 트랙의 사운드는 '신중현 사운드'와는 또 다르다. 보컬은 강한 바이브레이션과 진한 감정을 담은 소울풍의 열창이 아니라 가볍고 산뜻한 포크풍의 창법이고, 거기에 플루트와 바이올린으로 단장하여 깔끔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정성조 자신이 작곡한 노래들에서도 대부분의 곡에 드럼 비트를 삽입하면서 12현 기타, 플루트, 현악기, 혼 섹션을 추가하여 '깔끔한 느낌의 포크 록 음반'을 만들어 내었다.

쉐그린 - 사랑해요 당신을(1971) 
쉐그린 - 미련(1971) 

주) 신중현과 정성조의 음악적 교류는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이 화양연예주식회사가 소재한 용산구 원효로에 살았기 때문에 종종 함께 만나곤 했고 잠깐씩이나마 같이 음악 활동도 했다. '화양'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정성조 역시 미 8군 무대와도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색서폰을 배우기 위해 화양과 인연을 맺었고 미 8군 쇼단인 '스프링 버라이어티 쇼'의 멤버로 연주한 경력도 있다. 이후 그는 신중현과 다른 작업을 하기 위해 화양을 떠나는데(정성조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신문 기사에는 1970년 오비스 캐빈에서 연주하던 '신중현 오케스트라'나 퀘션스 해체 이후 1971년 '신중현과 그의 캄보'에서 다시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성조 본인은 기억에 없거나 그런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으므로 진위 여부는 파악하기 곤란한다). 이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포크 씬과 교집합을 이룬 것은 우연이기에는 너무 공교롭다. 물론 그들이 포크에 개입하는 방식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지만.

자신이 작곡한 곡을 편곡한 것은 아니더라도 정성조가 '포크 음반'에서 휘광을 드리우는 일은 계속되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결과는 김민기와 작업하면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김민기의 데뷔 음반 [김민기 노래 모음](대도 EU-716, 1971.10.21)에서 정성조는 '정성조 쿼르텟'을 이끌면서 리듬 섹션을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플루트("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길")와 색서폰("종이연(원제: 혼혈아)") 연주를 통해 재즈의 색채를 불어 넣었다. 그러니 이 음반의 주연은 당연히 김민기이지만, 정성조는 당당한 조연이고, 이 음반은 '조연이 주연을 더욱 빛나게 한 경우'에 속한다.

김민기 - 아하 누가 그렇게(1971) 
양희은 - 그 사이(1972) 

1년 뒤쯤 발매된 양희은의 [고운노래모음 제 2집: 서울로 가는 길](KLS-40, 1972. 11. 5)주)은 일련번호에서 알 수 있듯 킹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양희은의 '신중현 작품집'보다 몇 달 앞서 발매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음반은 통기타 중심으로 편곡되었던 양희은의 1집 음반에 비해 많이 다르다. 간략히 말한다면 김민기의 음반과 유사한 편곡이 들어가 있고, 아니나 다를까 음반의 뒷면 표지에는 정성조 쿼르텟이 등장한다. 주)

주) 이 음반에서 고영수와 조영남, 이수만("인형")의 참여는 당시 포크 공동체라 이름 붙일 만한 윤곽을 읽어낼 수 있는 코드가 될 것이다. 또한 김민기와 양희은의 두 음반에서 은연중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이는 독자적인 음반은 없지만 전설적인 포크 싱어송라이터인 김광희일 것이다. 김광희는 김민기의 음반에서 건반악기를 연주하고 현악 편곡을 맡았으며, 양희은에게는 '곡'을 주었다. 이런 '배후의 인물들'의 리스트에는 "백구" 등에서 기타를 연주한 강근식도 포함시킬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겠다.
양희은 - 백구(1972) 

마지막 사례로서 1년 반 뒤 '군에서 제대한' 한대수의 [멀고 먼 길](신세계, SIS-81115)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도 정성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여기서 그는 플루트 등 관악기 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오르간 등 건반악기도 담당했다. '어쿠스틱 록'인지 '일렉트릭 포크'인지 헷갈리는 "물 좀 주소"에서는 당시 자신의 밴드 메신저스의 멤버였던 조경수(!)가 베이스를 연주했다("아니야"를 부른 '가수 조경수' 맞다. 참고로 이 음반에서는 히 식스를 거쳐 신중현과 엽전들의 멤버였던 권용남이 드럼 스틱을 잡았다)

김민기 - 바람과 나(1971) 
한대수 - 바람과 나(1974) 

이 세 종의 음반들 가운데 양희은의 음반을 제외한다면 킹 프로덕션에서 발표된 것이 아니다. 또한 세 음반들 모두 쉐그린의 음반처럼 '정성조 작편곡집'이 아니라서 그가 음반을 전체적으로 감독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개성적 연주의 색깔은 너무도 강해서 이들 음반의 색깔에 깊고도 넓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종 '한국 포크의 명반'으로 꼽히는 세 음반에 정성조가 모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제까지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 아니었을까. 이 글은 그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 포크 록의 탄생? 그러나 아직은 미완의...

이제 신중현과 정성조가 개입한 포크 음반들에 대해 전체적인 평가를 내려 보자. 이제까지 언급한 포크 음반들에서 두 명의 역할은 요즘 말로 하면 '음악 프로듀서'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포크 음악에 개입하는 방식은 다르다. 신중현이 자신이 구상하는 사운드를 실현시키기 위해 주도자의 역할을 자임했다면, 정성조는 포크송의 '심심한' 사운드의 틈을 메우고 꾸며주는 보조자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중현의 싸이키델릭 록이 구현된 포크와 정성조의 재즈가 은근히 스며든 포크는 포크 씬이 보다 풍성해지는 계기를 창출했다는 점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통기타 순수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완고하게 집착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포크라는 음악은 자신들의 음악적 열정을 불사르면서 뜻을 펼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재즈에 심취해 있던 정성조에게 포크란 이 당시 부상하고 있던 대중음악의 하나의 새로운 조류 이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주) 반면 신중현의 시도는 자신이 구현하고 싶은 음악에 포크 가수를 객원 가수로 초빙한 것에 가깝다. 결국 두 인물을 통해 포크 씬이 풍성해진 현상은 우연적이고 일회적인 사건 혹은 순간이 되었다.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라는 상이한 씬이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경우라고 부르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신중현과 정성조의 손에서 태어난 '포크 록'은 사이키델릭 록도 아니고, 재즈 록도 아닌 별도의 차원으로 넘어가 버렸다. 짧은 순간 빛을 발하곤 급격히 사라져 버리는 별똥별처럼. 이럴 때 사람들은 '소중한 것은 순간 뿐이고, 순간만이 영원하리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주) 정성조의 그룹들 가운데 1972년 늦가을 경부터 활동을 시작한 정성조와 메신저스도 주목할 만하다.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 시카고 등과 비슷한 일명 브래스 록 밴드로 오비스 캐빈에서 열연했다. 같은 무대에 섰던 히 식스 같은 그룹 사운드와도 친분이 있었고 통기타 가수들과도 교류를 맺게 되었을 법하다. 신문보도([일간스포츠] 1972년 11월 5일)에 의하면 당시 멤버는 "트럼펫 최선배, 건반의 신관웅, 트럼본 윤광섭 등 TV 악단소속 등"이었고 그의 증언에 의하면 조원익(베이스)도 멤버로 참여했다. 이후 1977년 [어제 내린 비] 크레딧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최선배(트럼펫) 장석웅(기타 & 보컬) 변성용(오르간), 유영수(드럼), 조경수(베이스, 보컬), 최병걸(보컬), 정성조(색서폰, 플루트)에 이른다. 이들 중 유영수는 조원익과 함께 강근식이 이끈 동방의 빛에서도 활동하게 된다. 이후에도 '정성조 작곡 제1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아도니스(호와 섭) 음반(1976, 신세계, S 가 8013)에서 "정"을 비롯한 자신의 곡을 실었으며, 메신저스 이름으로든 정성조 개인의 이름으로든 수많은 영화음악들에 관여했다.

이들이 발표한 음반은 '대개' 킹의 '폭송'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이미 말했지만 빠뜨린 이야기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 보자. 물론 정성조의 경우는 신중현처럼 킹박이나 킹 레코드와 '전속'관계와 같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참여한 몇몇 음반들은 킹을 통해 나왔음은 앞에서 이미 보았다. 또한 이른바 정통 포크 계열로 일컬어지는 서유석, 양희은을 비롯해, 이 글에서는 분량 상 언급하지 못했지만 뛰어난 싱어송라이터들인 방의경, 오세은, 이연실 등도 킹 레코드를 통해 음반을 발표했는데,이 음반들은 대체로 통기타 중심의 편곡이다. 결과적으로 킹을 통해 나온 음반들은 '통기타 사운드 중심의 포크 음반 아니면 일렉트릭한 사운드를 담은 록 음반' 둘 중 하나다. 즉,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여기서 언급한 사례들, 즉 조심스럽게 '포크 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우는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 음반들은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음반들이고, 요즘 유행하는 문화연구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잡종(hybrid)'이자 '이형체(anomaly)'이자 '사생아(bastard)'다.

그렇다면 '포크 록'이든 '포크 팝'이든 '포크 가요'든(혹은 다른 무엇이든), 그리고 그것이 포크 고유의 '순수성'의 확대든 타락이든 포크가 '한국 대중음악'의 하나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이는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1973년에 포크가 대박을 터뜨린 사건'이 어떻게 가능했을까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킹 이외에 포크 음반을 제작하던 '전문 프로덕션'에 대해 탐구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한다면 하나는 '애플'이고 다른 하나는 '오리엔트'라는 프로덕션이다. 이 중 오리엔트는 킹박과 더불어 1970년대 한국 음반산업계의 풍운아인 '나현구 사장'이 운영한 프로덕션으로, 이장희의 3집 음반을 통해 시장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애플은? 애플 역시 킹과 마찬가지로 '유니버어살 음반사'를 통해 음반을 대명 제작했다. 그런데 유니버어살 음반사에서 발매한 음반들의 일련 번호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드는 시점을 전후하여 KLS 시리즈와 K-Apple 시리즈로 양분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두 킹박이 관여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전자가 킹이고 후자가 애플이며, 전자는 킹박이 직접 관여하고 운영한 것이 맞지만, 후자는 이종환이 관여하고 그의 처남인 김웅일이 운영한 프로덕션(대표는 고재동)이다. 이런 궁금증은 다음에 풀어보기로 하자.  20021017

* 최지선이 쓰고 신현준이 확대·보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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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펌] 그룹 사운드 출신들, '포크 싱어'들과 만나고 또 헤어지다(상) |작성자 kochinn

 

 

 

 


그룹 사운드 출신들, '포크 싱어'들과 만나고 또 헤어지다(하): 1973-1975


1973~4년 포크 빅뱅(Big Bang)!

MBC [금주의 인기가요]의 방영 모습. MC는 한때 자민련 대변인을 역임한 변웅전이다. 차트에 오른 곡들로 보아 1972년 경으로 추정된다. 박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신병순 작사·김희갑 작곡), 방주연 "그대 변치 않는다면"(주영자 작사·김영광 작곡) 등 '팝과 가요의 중간 정도인 곡들이 차트에 올라온 것이 보인다. 물론 차트 선정 방식은 '자의적'이었다.([문화방송 30년사](1992), p.134)

1973~4년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포크'(라고 불리는 음악)가 급부상한 해였다. 1970년대 들어 주류 차트에 한두 곡씩 진입하던 포크는 점차 가요계에서 상당한 지분을 잠식하기 이르렀고 TV 쇼 프로그램에 단골 손님으로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로 '포크 가수'들은 MBC의 [금주의 인기가요]같은 '가요순위 프로그램'의 상위를 차지했고 음악 프로그램 이외의 오락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했다. 단순 비교에 지나지 않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포크 가수들이 TV나 라디오 등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빈도는 1990년대 중반 '댄스 가수'들이 텔리비전에 등장하는 빈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포크 가수들은 '청년의 우상'을 넘어 '대중 스타'가 되었다. 이렇게 '판'이 바뀌었으니 '빅뱅'이라는 표현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이때 히트를 기록한 포크가요는 셀 수 없을 정도다. 한 가수에 하나만 뽑더라도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 어니언스의 "편지", 김정호의 "이름모를 소녀", 김세환의 "사랑하는 마음".... 주목할 점은 이 곡들이 단지 방송 전파를 많이 탔다는 것 뿐만 아니라 '히트 음반', 요즘 말로 '대박 음반'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위 곡들을 담은 이장희의 세 번째 독집(성음 SEL 20-0015, 1973)과 어니언스의 첫 독집(유니버살 K-Apple 785, 1974.3), 김정호의 첫 독집(유니버살 K-Apple 791, 1974.9) 등이 대표적이다. 1972년 이전까지 히트 음반이 대략 1~2만장 안팎의 판매량을 보였다는 통설을 믿는다면, 5만 장을 팔았다는 이장희의 경우는 단기간 내에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한 것이다.

이장희 - 그건 너(1973)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이장희 - 자정이 훨씬 넘었네(1973)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어니언스 - 편지(1974) (임창제 작사·작곡, 안건마 편곡)
어니언스 - 작은 새(1974) (김정호 작사·작곡, 안건마 편곡)

포크 가수의 인기는 음반의 히트에 이어 영화에서도 '대박'을 기록했다. 이장희가 부른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삽입된 [별들의 고향](1974)이 46만 관객을 동원한 것을 비롯해, 송창식의 "고래 사냥"과 "왜 불러"가 삽입된 [바보들의 행진](1975), 그리고 [영자의 전성시대](1975), [어제 내린 비](1975)가 모두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별들의 고향] 영화음악 음반은 1974년의 베스트셀러로 상종가를 쳤다. 이런 '청춘 영화' 및 '호스테스 영화'의 붐도 포크 음악의 상승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장희 - 한 소녀가 울고 있네(1974)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이장희 -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1974)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투 코리언스 -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1974)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포크였는가. 즉, 누가 왜 이런 음악을 TV와 라디오에서 보고 듣고 음반까지 구매했을까. 이를 위해서는 당시의 문화 정세 전반을 살펴보면서 '가요평론' 비슷한 분석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 정치적·문화적 상황이다. 1972년 말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안보'가 강조되었고, 그 결과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가요정화운동'이야 이때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때부터는 음악의 주제와 내용에까지 '미시적'으로 개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뜻밖인 것은 10월 유신으로 인해 된서리를 맞은 음악이 트로트였다는 점이다. 트로트는 비탄, 퇴폐, 저속, 나아가 왜색이라는 이유로 인해 트로트는 '10월 유신과 새마을 운동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불건전하다고 인식되기 시작되었다. 때문에 10년 이상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이미자를 비롯해 남진, 나훈아, 김 세레나, 주란, 조미미, 하춘화 등이 장악한 트로트의 철옹성은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면을 볼 때 포크는 적어도 처음에는 10월 유신과 가요정화운동의 '수혜자'였던 셈이다. 물론 뒤에 가면 사정이 반전되지만.

둘째 음반산업을 비롯한 경제적 상황이다. 사실 1973~4년은 경제적 호황기는 고사하고 '경제 위기'의 시기였다. 특히 1973년 말 제 1차 석유 파동은 경제개발계획 이후 '다른 건 몰라도 성장만큼은...'을 과시하던 한국경제에 최대의 시련을 안겨 주었다. 경제가 불황에 닥치면 가장 심한 타격을 받는 부문이 바로 '문화산업'과 '연예계'다. 음반의 경우 레코드(LP)의 재료인 PVC가 품귀 현상을 일으켰고, 이런 'PVC 파동'으로 인해 음반 제작은 축소되고 음반 가격은 인상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또한 그 전인 1971년 12월 초 문공부가 '비상사태하의 연예시책'을 발표하면서 음반사의 시설 기준이 2배로 강화되면서 공식 등록사가 16개사에서 12개사로 줄어든 상태였다는 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결과는? 경제상황에 민감한 성인층의 음반 수요가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청소년층의 음반에 대한 수요는 증가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음반을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이지만 젊은 애들은 '음반이 아니면 죽음을!'이고 주머니가 텅 비어도 살 건 사야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가 아니라 '그때부터' 이런 패턴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먹고 살 만해진' 시기가 이 무렵이니까...

주) 여기에 또 하나의 요인을 추가할 수 있다. 이른바 '불법복제음반 단속'의 효과다. "불법 복사판을 인정하지 않고 라이센스판만을 인정키로 하면서 지구, 오아시스 등을 비롯한 중대형 음반사들이 (특히 1973년 말경부터) CBS, EMI 등 국제적인 메이커와 제휴하는 등 라이센스 제작 시장에 뛰어들면서 국내의 '오리지널 가요' 음반의 제작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게다가 영세적인 상태에서 과도한 지출이 이에 뒤따른 반응이 약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방송 등의 미디어와 관련된 조건들이다. 이건 똑같이 '젊은이의 음악'으로 간주되었던 여타 장르(소울이나 싸이키델릭)를 '제치고' 포크가 주류로 부상했느냐는 문제와 관련된다. 물론 주류 언론에서 '그룹 사운드 침체'라고 호들갑을 떨던 것과는 달리 이 시기 그룹 사운드는 '밤의 세계'를 주름잡았다. 그렇지만 TV나 라디오로 음악을 경험하는 보통의 젊은이들에게 원초적 비트를 가진 '엘레키' 사운드가 아직은 버거운 것이었다. 여기에 당시는 가족 전체가 TV 앞에 모여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취향의 문제에 더하여 하나의 이유를 추가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그룹 사운드가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덩치 큰 악기와 장비들을 수고스럽게 운반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룹들은 보수도 시원치 않은 방송에 힘들게 출연하는 것보다는 살롱이나 클럽의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 반면 '통기타 포크' 가수들은 이런 부담이 작았다. 어떻게 보면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점은 포크가 여타 장르를 제치고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다.

이상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음악 수용자의 취향이 '급격히 변동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팝과 트로트'의 시장점유율 구성비는 1973년에는 "3 대 7 혹은 4 대 6 정도(1973.12.8, 1974.1.11 [일간스포츠])"였다가 1974년에는 "8 대 2 정도"(1974.12.19 [일간 스포츠])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팝'이라고 뭉뚱그린 음악들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포크' 계열이었다. 여기서 '팝'이라는 표기는 영미 대중음악이 아니라 '영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 대중음악'을 지칭했다는 점은 노파심에서 한번 더 지적해 둔다. 간단히 말하면 팝이란 트로트가 아닌 음악이었고 트로트와 가장 다른 음악은 '포크'였다.

수용자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무리해 두자. 그렇다면 이런 음악이 어떻게 생산되었을까? 당시까지 한국대중음악계에서 히트곡과 대박 음반은 지구와 오아시스라는 두 라이벌 기업으로부터 나왔다.'신중현 사단'의 킹 프로덕션 정도가 이들의 아성에 도전한 정도다. 포크는 어땠을까?

메이저 음반사와 포크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1973년 이후 '포크'나 '팝' 계열의 히트 음반을 제작한 음반사는 군소 레코드사들이었다. 1973년 가요계를 요약한 아래 기사를 훑어 보자. 지난 번에 간략하게 언급했던 기사인데 당시의 '빅뱅'의 효과를 보여주는 자료이므로 조금 길지만 거의 전문을 인용해 보자.

"'73년 가요계 결산 - '뽕짝'에서 '팝'調로", [주간중앙] 1973.12.16의 헤드라인

"1973년도 가요계 추세는 팝송조(조(調) 가요 특히 포크송조(調)의 대두로 집약된다. 한해 동안 5만장 이상 팔린 곡은 문주란 양의 "공항의 이별", 패티 김의 "이별", 장현 군의 "미련", 이장희 군이 자작 노래한 "그건 너". (중략) 특히 이 세 곡은 73년도 가요계를 온통 뒤집어 놓은 셈이다. (중략) 그런데 "이별"은 '신세계', "미련"은 '킹', "그건 너"는 '성음' 레코드사 제작. 최대의 히트곡 3곡이 모두 군소 '메이커'에서 나와 대 '메이커'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양대 메이커에서 뽕작조(調)에만 매달려 있는 사이에 군소 메이커에서 포크조(調)에 손을 대어 성공시킨 것이다. 뒤늦게 포크 붐을 깨달은 양대 메이커는 통기타 부대라 불리는 포크 계열의 가수들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 스카우트 열풍을 일으켰다. 이 통에 소문없이 재미보던 군소 메이커들까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싸움에 말려들었다.
우선 눈치 빠르기로 이름난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선수를 쳤다. 이수미, 조미미, 방주연 삼총사팀을 급거 장미화, 이성애, 서현진 등 팝팀으로 교체하는 동시에 성음의 이장희에게 손길을 뻗쳤다. 그러나 오아시스의 첫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정보를 미리 안 성음측에서 이장희 군에게 100만원 짜리 오토바이를 사주는 한편, 오아시스의 인기 작곡가인 김영광씨에게 200만원을 주겠으니 오라고 손짓한 것이다. 간판 가수로 내세운 장미화, 이성애, 서현진 팀도 곧 깨졌다. 여군 중위 출신인 서현진은 "가요계가 싫다"고 불러섰고, 이양은 지구에서 100만원을 받고 옮겼다. '엎친 데 덮친 격'인 오아시스는 달러 박스인 이용복군 마저 지구에 빼앗기게 되자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애플 레코드에 있던 홍민군을 필두로 템 페스트, 뚜아 에 모아, 라나 에 로스포, 투 코리언즈 등 팝 팁을 대거 스타우트해 진용을 개편했다. 세계적인 팝송 메이커인 영국 EMI 레코드 사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은 것도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비상 작전.
한편 지구는 거액의 스카우트 자금(3000만원설)으로 유망주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우선 150만원을 주고 작곡가 신중현씨를 킹으로 데려오는 한편, 군에서 조영남을 전속시키고 오아시스에서 이용복군과 이성애양을 모셔왔다. 신중현씨의 제자는 김추자, 김정미양과 장현군. 항간에서는 지구에서 이들까지 데려가려는 욕심이 아니냐는 쑥떡공론. 다급해진 킹에서는 장군에게 "미련"에 대한 보너스조로 100만원을 주기까지 했다. 이래저래 포크 붐을 타고 여러가수가 돈을 번 셈. 그래서 가요계에서는 '돈 백은 우습게 본다'는 육담이 유행됐었다. ("'73년 가요계 결산 - '뽕짝'에서 '팝'調로", [주간중앙] 1973.12.16)"

이런 스카웃 전쟁은 성공했을까. 적어도 1975년까지 결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따져 보면 지구와 오아시스 모두 1973년 이전에도 팝 계열의 가수들의 음반을 제작해 왔다. 하지만 1972년 이전이든 1973년 이후든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지구의 경우 펄 시스터스, 트윈 폴리오, 윤형주, 라나 에 로스포, 은희, 최양숙, 어니언스, 고영수, 원 플러스 원 등의 음반 한두 종을 제작했지만 트윈 폴리오의 첫 독집(1970년)을 제외하고는 음반사와 가수(혹은 그룹) 모두에게 흡족한 결과는 나오지 못했다. 오아시스의 경우는? 오아시스는 지구에 비해서도 트로트가 강한 음반사다. 하지만 오아시스의 경우도 히 식스, 템페스트, 에보니스, 4월과 5월, 투 코리언스, 홍민 등 젊은 팝 계열의 가수나 그룹의 한두 종의 음반을 제작한 일이 있다. 또한 1972년에는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이라는 타이틀로 다섯 장의 시리즈 음반을 연달아 발매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음반들의 경우도 오아시스의 주력 업종은 아니었다.

메이저 음반사들이 팝이나 포크에 개입한 결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포크와 트로트가 결합된 묘한 양식의 탄생이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김영광이다. 그는 남진의 "울려고 내가 왔나"(김중순 작사·김영광 작곡)나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남국인 작사·김영광 작곡) 등 트로트곡으로 이른바 '히트 제조기' 대열에 오른 인물인데, 1972년에는 작곡 스타일을 바꾸어서 포크송 스타일을 차용한 곡을 만들어 취입했다. 대표적인 곡은 이수미의 "여고시절"(주영자 작사·김영광 작곡)과 방주연의 "그대 변치 않는다면"(주영자 작사·김영광 작곡)이었다. 물론 1972년은 남진의 "목화 아가씨"(정두수 작사·박춘석 작곡)나 님과 함께"(고향 작사·남국인 작곡)와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정두수 작사·박춘석 작곡)와 "머나먼 고향"(박정웅 작사·작곡) 등 트로트 계열의 곡들이 안방극장과 진짜 극장을 점령한 해였다. 그렇지만 이런 인기곡들이 '눈물과 한숨조'라는 식의 평을 받았던 반면 김영광이 만든 곡은 이런 평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72년을 결산하는 한 기사에서 "내놓는 가요마다 포크송풍의 건전가요라는 격려 속에 안타(히트)를 계속"([일간스포츠],1972.12.29) 했다는 평을 받았다. '가요정화운동'과 '10월 유신'이 대중음악계에 미친 효과는 이런 해괴한 미학적 기준의 성립이었다.

포크와 트로트가 결합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일까. 여기서 1972년 대중음악계의 트렌드가 "가요 정화 운동 탓과 취향의 변화로 인해 트로트 가수들이 비(非)트로트 가요에 열 올리는 추세"([일간스포츠], 1972.2.16)라고 말한 것에 유의하자. 즉, 지금 언급하고 있는 양식은 포크가 트로트를 능동적으로 도입한 결과가 아니라 트로트가 포크를 흡수한 결과다. 그러니 '포크 트로트' 혹은 '트로트 포크'(이 용어들은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서 트로트가 포크를 흡수하던 현상에 대해 일절하며 보도하던 용어들이다. 예를 들어 위의 기사에서는 이수미의 "여고시절"을 '포크송을 도입한 트로트 가요'라고 소개하고 있다)라는 변태적 양식은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흐름을 기성의 시스템과 절충시키고 중성화시킨 것 이상은 아니었다.

결국 1970~1년에 절정을 이루었던 포크는 1972년에는 다소 주춤거리면서 기성 시스템에 의해 굴절되는 시기를 보낸다. 물론 1972년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후 메이저 음반사에서 나오는 '포크 음반들'의 대다수는 이런 '굴절'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뒷이야기를 알아볼 필요도 없이 음반을 직접 들어보면 이 점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포크의 미덕으로 간주되는,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연주하는' 관행이 제대로 존중되지 않을뿐더러 편곡과 기악편성 면에서는 '기성의 느낌'이 많이 묻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음악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전속 작곡가'들이 통기타를 들고 작곡된 곡을 편곡하고 프로듀싱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으리라... 또한 음악적 훈련이 충분치 않은 포크 가수(통기타 가수)들은 자신의 곡에 어떤 악기를 사용하여 어떻게 편곡할지 잘 몰랐다. 어쿠스틱 기타의 연주만으로 편곡을 마치자니 썰렁하고 그렇다고 전속관현악단을 가동하자니 오히려 어색하고.... 그래서 메이저에서 나온 포크 음반들의 사운드는 이 둘 중 하나다. 썰렁하거나 어색하다는 뜻이다.

메이저 음반사의 레이블을 달고 나온 음반 중에서 들을 만한 음반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 두 종의 음반을 '샘플'로 뽑는다면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 vol.1'로 발매된 [4월과 5월 작품집](오아시스 OL 1077, 1972.4.25)과 어니언스와 고영수의 합동 음반 [어니언스·고영수](지구 JLS-120691, 1973.5.5)다. 이 음반들의 사운드는 어쿠스틱 기타 위주의 반주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드럼-베이스-기타-오르간 등 이른바 4 리듬을 가진 '그룹'의 사운드가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그룹이 각각 1년쯤 뒤에 발표한 음반들은 '사운드'가 확 다르다. 4월과 5월의 경우 위 음반에서는 '그룹'이 연주하는 사운드는 10곡 가운데 "화"와 "푸른 하늘" 두 곡이지만 1년쯤 뒤에 발표한 [4월과 5월 Vol.2](K-Apple 787. 1973(추정))에서는 훨씬 더 많은 곡들로 확장된다. 한편 어니언스의 첫 독집(유니버살 K-Apple 785, 1974.3)의 경우는 위 음반과 기악편성은 비슷하다 해도 느낌이 확 다르다. 예를 들어 "사랑의 진실"의 경우 두 버전 모두 드럼과 베이스 등이 연주하고 있지만 그렇지만 트럼펫의 취주와 통기타의 아르페지오가 어색하게 동거하던 편곡으로부터 현악기와 오르간이 가미된 세련된 편곡으로 바뀌어 있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지구에서 나온 어니언스와 고영수의 합동 음반, 원플러스원 음반은 김진성이, 애플에서 나온 4월과 5월은 이종환이 각각 기획했다. 여기서 두 음반 모두 K-Apple이라는 일련번호를 달고 나왔음에 주목하자. 이제 드디어 '군소 레코드사가 제작한 포크 음반'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4월과 5월 - 사랑의 의지(백순진 작사·작곡·편곡)

주) 물론 이 시기의 포크가 모두 '전문화'와 '대중화'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애플과 오리엔트 등 대중적인 포크 음악을 위한 전문 레이블이 탄생하는 현상 이면에는 포크 본연의 아마추어적 성격과 '통기타 순수성'을 견지하는 흐름도 존재했다. 한 예로 명동 소재의 음악감상실 내쉬빌은 대학생을 위주로 한 비상업적 공간으로 이들이 1972년에 제작한 [우리들](유니버어살, UL-726)은 이들 아마추어 포크 가수들의 비상업적 음반이었다. 한편 1973년 8월에 개최된 제 3회 청평 팝 페스티발이 프로페셔널 음악인 중심이 아니라 대학 재학생을 위한 아마추어 팝 콘테스트로 바뀐 현상도 '프로와 아마추어의 양극화'라는 현상의 한 측?湧막? 볼 수 있다.

김광희 - 가난한 마음/나는 돌아가리라(1972) (김광희 작사·작곡)
방의경 - 불나무(1972) (방의경 작사·작곡)

애플 프로덕션 그리고 '이종환 사단'의 편곡자(1): 김희갑의 경우

주) 원래 '애플 레코드'고 불러야하지만, 이곳이 유니버어살 레코드사를 통해 대명제작하는 주체, 즉 지금의 프로덕션이나 음반기획사에 해당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프로덕션으로 칭하기로 한다.

앞의 글에서 포크가 '통기타 반주'를 넘어서 분열증식하는 단계에서 싸이키델릭(신중현의 경우)이나 재즈(정성조의 경우)와 같은 상이한 음악 스타일과 만났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대략 1971-2년 경의 일이다. 하지만 이런 만남이 순간적이고 일회적이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한 바 있다. 고로 이런 다른 장르와의 이종교배를 통해 포크를 풍성하게 만들고 나아가 지속성과 전문성이 담지되기 위해서는 '전문 프로덕션'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물론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도 필요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사진: 종로 시절의 셸부르 - 1972년 초 잡지에 실린 광고. 당시 종로 낙원상가에 있었으며 고고 음악도 함께 연주되었고, 더불어 '포크 콘테스트'가 열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출처: www.windbird.pe.kr 김병완 님)

그 첫 타자가 킹 프로덕션이었음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렇지만 킹은 아무래도 '소울·싸이키'가 주력 업종이었고 양희은, 서유석 등은 '덤으로' 음반을 제작한 측면이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포크 음반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프로덕션은 애플 레코드라는 곳이었다. 애플의 대표는 따로 있었지만 이곳은 이종환과 그의 처남인 김웅일이 운영을 맡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종환은 최근까지 MBC 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서 MC를 맡았던 그 인물이고, 당시에는 MBC 라디오의 PD로 재직하면서 인기 심야방송이었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고 있었다. 경기도 교외 도처에 경기도 교외 도처에 지점을 가진 라이브 카페 '이종환의 셸부르'도 그의 비즈니스의 하나로 보인다. 물론 셸부르는 1972년경에는 종로에, 1975년경에는 명동에 있었다.

문제는 지금 시점에서 음반들을 훑어 볼 때 '애플'은 시리얼 번호 외에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의 [주간중앙]의 기사에서도 애플에 대해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눈썰미 좋은 사람만이 "홍민이 오아시스로 이적하기 이전 애플 레코드 소속이었다"는 정보를 파악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플에서 제작한 음반들은 '유니버어살 레코드'라는 상호를 빌려서 나왔기 때문이다. 유니버어살이라... 유니버어살은 방금 말한 킹 프로덕션과 '신중현 사단'의 음반을 주로 제작한 스튜디오이자 공장의 이름 아닌가. 헷갈린다.

음반 시리얼 번호를 뒤져보면 K-Apple로 시작하는 음반들은 이미 1960년대 말부터 등장했다. 다름 아니라 키 보이스, 히 화이브, 트리퍼스 등 그룹 사운드의 음반들이다. 문제는 이 음반들 중 몇몇은 '킹박이 제작한 음반'이라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킹 프로덕션의 경우 주로 KLS로 시작하는 일련번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욱 헷갈린다. 그래서 그저 음반사들이 청계천 일대에 몰려 있던 당시 상황에서 군소 레코드사들 사이에 이런저런 교류가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때문에 K-Apple로 시작한다고 해서 다 애플에서 나온 음반이 아니며, KLS라고 시작한다고 해서 다 킹에서 나온 음반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넘어 가자.

분명한 것은 1971년 이후 애플 레코드는 '통기타 가수들'의 음반에 주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몇 개의 예만 들어 보면 [송창식 애창곡 모음](K-Apple 36, 1971), [윤형주 골든 앨범](K-Apple ?, 1971), [윤형주 즐거운 노래모음](K-Apple 48, 1972.7.18), [김세환 노래모음](K-Apple 52, 1972.5.23.), [송창식 애창곡 모음 2집](K-Apple 56, 1972) 등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트윈 폴리오의 후예들, 그리고 요즘 '포크 빅 3'로 불리는 솔로 가수들이 '이종환 사단'의 핵심을 형성한 것이다. 한 예로 [송창식 애창곡 모음]은 '별밤에 부치는 노래 시리즈 1'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고 표지 뒷면에는 이종환의 긴 소개글이 적혀 있다. 원곡이 외국 곡인 경우 '이종환 개사'라고 표기된 경우도 꽤 있다.

더욱 주목할 점은 위 그룹 사운드의 음반들은 물론이고 이들 포크 음반들 대다수도 '김희갑 작편곡집'이라는 사실이다(단, 팝송을 번안해 부른 [송창식 애창곡 모음]은 작편곡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고, [윤형주 즐거운 노래모음]은 김희갑의 작품이 아니다). 김희갑이 뛰어난 작곡가라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작곡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기타리스트였으며 캄보 밴드를 이끌던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 8군 무대에서 수년 동안 항상 더블 A를 받았다는 최고의 쇼였던 A1 쇼(에이원 쇼), 일반무대에서는 UN 클럽과 경동호텔 나이트클럽 등 시내의 고급스러운 클럽을 평정한 악단에서 연주했던 '김희갑 악단'의 리더다. 또한 미 8군 무대 출신으로는 신중현과 마찬가지로 이교숙(당시 이화여대 교수)에게 사사받고 1967년부터는 히트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주) '김희갑 작편곡집'으로 최초의 음반이자 히트를 기록한 음반은 태원의 "사랑아 내 사랑아", 김상희의 "진정 난 몰랐었네", 남진의 "불타는 연가", 이정자의 "모래 위를 맨발로" 등이 수록된 '옴니버스 음반'으로 1967년 오아시스에서 발매되었다. 즉, 김희갑은 1968년까지는 오아시스와 전속관계를 맺고 활동했다. 한편 이 곡들 가운데 "진정 난 몰랐었네"는 송창식이, "모래 위를 맨발로"는 김세환이 각각 리메이크했다. 위에서 소개한 음반에 수록되어 있다.

김희갑이 이들 주류 가수들의 음반에 이어 앞서 언급한 1세대 그룹 사운드의 음반의 실질적 디렉터였다는 사실은 재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사실이다. 대략 1969~70년 경의 일이다. 이 음반들이 K-Apple이라는 일련번호를 달고 나온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때 김희갑은 여러 음반사에서 이런저런 음반을 레코딩하느라고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박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이승재의 "눈동자", 이용복의 "달맞이꽃" 등이 1970년대 초 김희갑이 작곡하여 히트시킨 곡들이다. 이 가운데 이승재와 이용복은 '범(凡)포크 진영'에 속하는 가수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통기타 부대의 주력군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1970-1년 경 김희갑이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의 음반의 디렉팅을 맡은 결과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송창식 - 나는 너(1972) (김희갑 작사·작곡·편곡)
김정호 - 눈동자(1975) (지웅 작사, 김희갑 작곡·편곡)

여기서 잠시 당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던 방식을 떠올려 보자. 그룹 사운드의 음반의 디렉팅(요즘 말로 하면 프로듀싱)은 그룹이 '한번에' 노래와 연주를 함께 하는 것을 녹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룹이 아닌 솔로 가수의 경우는 녹음 방식이 달랐다. 그래서 세션 연주자를 동원한 악단이 먼저 연주하는 것을 녹음하고 가수는 뒤에 노래만 덧입히는 녹음 방식이 당시의 지배적 관행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한 차례 오버더빙을 하는 방식이고, 당시의 업계 용어로는 '오도아와세(おどあわせ, 音合)'라고 부르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포크 음반의 레코딩은 트로트 등 기성 음반의 레코딩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문제는 트로트의 '낡은' 사운드가 아니라 포크에 걸맞는 '젊은' 사운드를 만들어내느냐였다. 김희갑이 디렉팅한 포크 음반은 어땠을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중용적이다. 그의 작곡과 편곡 스타일은 젊은 취향과 성인 취향, 간단히 말하면 팝과 가요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했다. 그래서 몇몇 곡의 경우 세대와 취향을 가로지르는 대중적 히트곡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송창식의 "상아의 노래", 김세환의 "옛 친구" 등이 그렇다. 그렇지만 취향에 따라서는 김희갑의 편곡을 거친 포크송에서 통기타 음악의 젊고 '모던'한 감성이 다소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건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김희갑이 자작곡 가수(싱어송라이터)라는 정체성, 즉 포크 가수를 기성 가수와 구분시키는 정체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든 음악적 사운드는 김희갑의 지휘 하에 편곡되고 녹음되었고, 포크 가수들은 녹음된 반주에 맞추어 노래만 불렀기 때문이다(송창식은 [송창식 애창곡 모음 2집]을 녹음할 때 자신은 "노래만 불렀다"고 술회한 바 있다. 다른 음반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신중현과 마찬가지로 김희갑의 경우에도 포크 가수들과의 만남은 하나의 시도라는 의미는 충분하지만 일관된 색깔을 만들어서 어떤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한 결과를 낳았다(개인적 견해로는 김희갑이 포크 가수와 작업하여 최상의 결과를 낳은 것은 양희은의 "하얀 목련"(1983)으로 보인다).

애플 프로덕션 그리고 '이종환 사단'의 편곡자(2): 안건마의 경우

1974년에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어니언스의 "작은 새"에서 기타 멜로디에 이어 나오는 피아노의 우아한 타건,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에서 두터운 현악과 오르간의 떨리는 소리(이건 야마하 오르간에 레슬리 스피커를 연결하여 만든 소리다)를 잊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런 소리들은 이전의 '통기타 포크'와는 무언가 달랐다. 전주뿐만 아니라 이후를 들어봐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프로페셔널 음악인이 치밀하게 악보를 그려서 편곡을 하고 실력있는 음악인들이 능숙하게 합주를 한 음악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프로페셔널하면 구태의연하다'는 통념과는 달리 젊고 모던한 감각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또한 신중현이나 정성조가 개입한 '실험적' 음악과는 다르게 '대중적' 감각을 겸비하고 있다. 이런 특징이 포크를 '통속화'시킨 것이냐 아니냐는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어니언스 - 작은 새(1974) (김정호 작사·작곡, 안건마 편곡)
어니언스 - 외기러기(1974) (김정호 작사·작곡, 안건마 편곡)
안건마 악단 - 이름 모를 소녀(연주곡) (1975) (김정호 작사·작곡, 안건마 편곡)

어니언스 음반 [작은 새/초저녁별(안건마 편곡집)](애플/유니버살 K APPLE 785, 1974) 뒷면에 나와 있는 연주인 이름

그 주인공은 안건마, 그리고 그가 이끈 '안건마 악단'이다. 이때 '악단'은 김희갑 악단과 마찬가지로 풀 멤버의 밴드가 아니라 소규모의 캄보 밴드다. 특이하게도 어니언스와 김정호의 음반에는 '연주인'의 이름이 나와 있다. 안건마(피아노), 김윤덕(기타), 함형진(오르간), 김호식(드럼), 김기진(베이스)가 라인업이다. 뒤에 볼 동방의 빛과 더불어 음반 표지에 연주인의 이름이 상세히 적혀있는 드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이름이 있다면 김호식이라는 이름이다. 신중현이 1968~9년 이끌던 덩키스의 드러머이자 엽전들 초기에도 드럼 스틱을 잡았던 바로 그 인물이다. 전설적으로만 알려져 있는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의 '초판' 말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악단의 '마스터'인 안건마다. 안건마는 가수 배호의 인척으로 그의 가계는 김광수, 김광빈, 안마미 등 한국 대중음악의 태동기를 풍미한 음악인들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다. 이건 그와의 인터뷰를 참고하기 바란다. 아무튼 피는 속일 수 없는 법인지 안건마는 남산국민학교와 휘문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밴드부 생활을 했고, 서울 을지로의 미군부대인 EDFE의 클럽에서 '민들레 악단' 혹은 '나이츠 오브 멜로디(Knights of Melody)'라는 이름의 빅 밴드에서 테너 색서폰 주자로 경력을 시작한 인물이다. 중학교 3학년때의 일이라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때 이 빅 밴드에서 앨토 색서폰을 불던 인물이 '이자 백자 천자' 쓰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그렇고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악단을 조직하여 뉴 코리아 호텔, 국제호텔, 로얄 호텔 등에서 캄보 밴드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의 경력은 음악을 미치도록 좋아하면서 1960년대에 성장기를 보냈던 젊은이가 걸었던 길이다.

그런데 캄보 밴드와 그룹 사운드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캄보는 '재즈'이고 그룹은 '록'일까. 음악인의 취향은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음악을 직업으로 하면서 자신들의 '직장'인 업소에서 요구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그룹이 자신의 취향대로 연주할 수는 없다. 한국의 음악인들이 한 가지만 해서는 살아남기 힘들고 그래서 자신과 스타일이 맞지 않는 음악도 연주하면서 살아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캄보 밴드라고 하더라도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나 '경음악'을 연주했다. 그 결과 캄보 밴드와 그룹 사운드의 리듬 파트의 편성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드럼, 베이스, 기타, 피아노(혹은 오르간)이라는 이른바 '4 리듬(four rhythm)' 말이다.

그런데 '마스터'의 삶은 더 바쁘고 힘들었다. 특히 밤에는 멤버들과 함께 나이트클럽, 카바레, 살롱 등에서 분위기에 맞는 '경음악'을 연주하고, 낮에는 스튜디오에서 가수들의 녹음을 지휘하거나 영화음악이나 광고음악같은 실용음악을 작곡·편곡하는 것이 음악 신동의 삶이었다. 정작 하고 싶은 음악은 관객 없이 멤버들끼리 자유롭게 잼을 할 때나 연주했을 것이다. 아마도 안건마는 정성조와 더불어 '제대로 음악을 공부해서 음악을 직업으로 삼은 대표적인 젊은 음악인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김인배 악단, 최석재 악단, 이봉조 악단, 최상룡 악단, 이인표 악단, 이인성 악단, 여대영 악단같은 이름이 그리워진다. 오랜만에 다음 곡이나 들어 보자.

최석재 악단 - Scarborough Fair
김인배 악단과 히 화이브(He 5) -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안건마가 애플 프로덕션과 관계를 맺고 '대중가요의 편곡자'가 된 계기도 영화음악을 맡은 것이 계기를 이루었다. 당대의 청춘 스타 하명중이 주연을 맡은 [마음은 푸른 하늘](1973)이라는 영화였는데 여기서 송창식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솔로 가수 송창식의 세 번째 독집인 [Brand New Song: Song Chang Sik(안건마 편곡집)](K-Apple 786, 1973.11.29)은 '안건마 편곡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다. 이 음반 역시 김희갑 작편곡집에 비한다면 '모던'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송창식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존중하면서 절제되게 편곡된 사운드를 담고 있다. 그래서 "밤눈"이나 "철지난 바닷가"같은 숨겨진 명곡들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박 히트를 하기에는 무언가 미흡하다.

송창식 - 밤눈(1973) (최인호 작사, 김정호 작곡, 안건마 편곡)

그 다음 스토리는 앞에서 여러 번 운을 띄웠다. 송창식의 세 번째 독집보다 음반 시리얼 번호가 하나 앞인 어니언스의 첫 독집(K-Apple 785)이 1974년 3월에 나왔고 6개월 뒤에는 김정호의 첫 독집(K-Apple 791)이 나오면서 '안건마가 누구냐?'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어니언스의 음반들에 '임창제 작사·작곡'이라고 표기된 곡들 가운데 다섯 곡("작은 새", "외길", "사랑의 진실", "저 별과 달은", "사랑의 진실")이 '사실은 김정호가 만든 곡'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해프닝은 가수나 음반사의 신뢰성에 손상을 가했을지는 몰라도 편곡자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안건마는 애플과 관련된 가수들의 음반에 편곡을 담당하면서 1970년대 중반을 화려하게 보낼 수 있었다.

'이종환 사단'의 영광과 굴욕

'이종환 사단'은 이른바 '옴니버스 음반을 시리즈로 발매하는 전략'에도 능했다. 애플 레코드를 통해서는 [별밤에 부치는 노래 시리즈], [Young Festival], [Young Family] 등의 이름을 단 음반을 연달아 발매했다. 타이틀이 식상해지는 듯한 감이 오면 바꾼 이름들이다. 이 음반들은 싱글 음반이 없는 한국에서 일종의 히트 싱글 모음집같은 기능을 했다. 이종환 사단의 영향력은 군소 레코드사에 머무르지 않았는데 한 예로 1972년 메이저 음반사인 오아시스를 통해 [Oasis Folk Festival]이라는 음반들을 시리즈로 발매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또한 1975년 3월에는 또하나의 메이저 음반사인 지구 레코드를 통해 '음악실 셸부르 기획작품집'이라는 타이틀로 쉐그린, 권태수, 김세화 등의 독집을 발매했다.

주) 포크와 관련되어 시리즈로 발매된 '옴니버스 음반'(컴필레이션 음반)으로는 이들 외에도 그랜드에서 제작한 [국내 6대 포크 싱어들의 대향연] 시리즈, 오리엔트에서 제작한 [Golden Folk Album] 등이 있다. 한편 컴필레이션 음반처럼 보이는 독집의 형태도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Young Festival Vol. 1]은 이장희의 독집 앨범이고 [Oasis Folk Festival Vol. 4]은 이수미의 독집 앨범이다.

송창식 - 딩동댕 지난 여름(1972) (임진수 작사, 송창식 작곡·편곡, 정성조 악단 연주) ([Young Festival Vol. 2](애플/유니버어살, K-Apple 778) 수록)

셸부르(혹은 쉘브루)란 무엇인가? 이종환이 경영한 '음악실'이다. 신진백화점 건너편 2층의 '복다방'에서 출발하여 '금수강산'을 거쳐 최종적으로 종로의 셸부르로 안착해 1975년에는 다운타운의 중심인 명동으로 이전했다. 그러면서 셸부르는 세시봉과 르 실랑스를 잇는 포크 음악의 산실의 지위를 차지했다. '음악실' 셸부르는 '음반 프로덕션' 애플과 더불어 이종환이 MBC PD 자리를 그만둔 뒤 이종환 사단을 지탱해준 두 개의 축이었다. 셸부르는 '경연대회' 같은 행사를 개최하여 신인 가수를 발굴하는 등 이종환 사단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어니언스, 김정호, 홍민 등 간판급 스타에 이어 석찬, 이영식, 이수만, 채은옥, 김인순, 김세화, 현혜미 등이 뒤를 이었고, 사단은 1970년대 후반 이후에도 인맥을 연장했다. 남궁옥분, 임지훈, 유익종, 김승덕, 강은철, 강승모, 이문세 등등.

사진: 명동 시절의 셸부르 광고 - 종로에서 명동으로 '겁없이' 이사했다는 사실로부터 명동이라는 곳의 지명도를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이곳을 거쳐간 상당수의 포크 가수들도 확인할 수 있다(출처: www.windbird.pe.kr 이성길 님)


그런데 이종환 사단에는 이른바 '연예계형 스캔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1973년 '이수미의 피습'과 '박성원의 자살'이라는 끔찍한 사건도 포함된다. 박성원 사건으로 인해 이종환 본인도 1975년 법의 제재를 받았다. 하지만 사건의 진상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여기서 뭐라고 논평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들은 애플과 셸부르를 통해 '포크'가 전성기를 구가함과 동시에 이제 이전의 '순수한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음을 상징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종환 사단'도 1975년의 대마초 파동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간판급 가수들이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을 중단당하면서 특히 타격을 받은 것은 음반의 판매였다. 결국 애플은 서울음반에게 판권을 양도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김웅일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안건마도 1980년 미국의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다. 복잡하고 아리송한 연예계에서의 복마전같은 삶은 그처럼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에게 많은 내적 갈등을 안겨준 모양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삶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찾았고 지금은 뉴욕의 새노래교회에서 음악목사로 재직 중이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의 선택에 시비를 걸 수 없지만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들 중의 하나인 그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그런데 안건마의 편곡이 포크를 대중화시키고 통속화시켜서 '가요'로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도 있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이럴 때는 "Both Sides Now"같은 곡의 가사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또하나의 전문 프로덕션인 오리엔트를 살펴본 뒤 함께 결론을 내리기로 하자.


'동방 박사' 나현구 사장

사진: 오른쪽 부분에 보면 '오리엔트'라고 적힌 글귀가 보인다. 물론 이런 레이블은 오리엔트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음반들이라고 하더라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이 레이블은 송창식 [송창식 골든 앨범](신세계, 1978)에 등장하는 것을 스캔한 것이다.

애플의 경우 포크 가수들이 노래를, 캄보나 그룹 출신의 연주인은 편곡을, 그리고 연주인이 지휘하는 악단이 연주를 담당했다. 그렇다면 이제 직업적 작곡가의 손길이 없이 자체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포크 음반을 제작할 수는 없었을까. 이제 이렇게 운영되었던 전문 프로덕션을 살펴볼 차례다.

다름 아니라 이장희의 음반을 제작한 오리엔트 프로덕션이라는 곳이다. 그 전에 몇 가지 의문부터 해소해 보자. 앞에서 인용한 [주간중앙]의 기사에는 이장희의 음반을 발매한 곳이 '성음'이라고 나와 있고 성음을 '군소 음반사'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성음이야말로 한국에서 '클래식 음반' 시장을 독점하다시피했던 메이저 음반사 아닌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은 비슷한 시기 한 일간신문에 나온 기사를 보면 찾을 수 있다. "그동안 메이커별 세력양상은 톱 메이커 지구와 오아시스가 트로트에만 신경을 써왔던 입장....(중략)...팝 계열 음악은 양희은, 장현, 서유석, 김희갑 등을 포용한 킹 레코드와 이장희, 김세환, 장미리 등을 앞세운 신흥 오리엔트가 용호상박하는 4파전."([일간스포츠], 1973.12.8)라는 문구가 들어있는 기사인데, 이걸 보면 '성음'이란 상호(label)을 빌려준 제작사일 뿐이고 '프로덕션'은 오리엔트임을 알 수 있다. 킹 레코드야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고...

오리엔트라는 프로덕션은 성음레코드의 기술부장으로 근무하던 나현구가 1973년경 설립한 것이다. 나현구라는 인물은 킹박과 더불어 한국 음반산업의 역사를 거론할 때 한 장을 장식할 만한 인물이다. 작곡가 나운영의 후손이자 가수 김세환의 이모부이기도 한 그는 대마초 파동 이후 오리엔트가 부도로 사라지기까지 약 3년 동안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다. 불행히도 그는 현재 칩거 중이라 그의 소식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어서 아직도 그에 관해서는 미스테리가 많다. 1970년대 말 ~ 1980년대 초에는 힛트 레코드를 설립하여 혜은이("제 3 한강교"!), 와일드 캣츠("마음 약해서"!), 장계현("너 너 너"!), 조동진("제비꽃"!) 등 극히 다양한 장르에 걸친 음반들을 제작하면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그후 소리소문이 없다.

주) 킹박(박성배)과 나현구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인물이다. 킹박이 '빽판장사'로 시작하여 밑바닥부터 자수성가한 비즈니스맨인 반면, 나현구는 서울대학교 공대 출신의 엘리트에 변리사를 비롯한 각종 자격증을 보유한 엔지니어였다. 히트곡에 대한 감각의 경우 킹박이 '동물적'이었던 반면, 나현구의 경우는 '합리적'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음악인에 대한 태도에서도 킹박이 방임형이었던 반면, 나현구는 개입형이었다. 후문에 의하면 두 라이벌이 뚝섬 스튜디오 앞의 한강 백사장에서 '맞짱'을 뜬 적도 있다고 한다. 나현구가 원래 뚝섬의 스튜디오에 있으면서 1973년 이전부터 포크 가수들의 음반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많다. 양희은의 자서전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나 음반의 해설에 보면 양희은의 [고운노래 모음 1집]과 [고운노래 모음 2집] 뚝섬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반면 음반 시리얼은 KLS로 시작한다. 고로 킹박과 나현구 사이에는 모종의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맞짱' 사건도 역시 그와 관련된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추측일 뿐이며 앞으로 해명해야 할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오리엔트 역시 애플 프로덕션이 유니버어살 레코드를 통해 대명제작한 것처럼 다른 음반사를 통해 대명제작했다. 오리엔트가 차명(借名)한 음반사들의 변천은 오리엔트에서 제작한 옴니버스 시리즈인 [Golden Folk Album]을 훑어보면 파악할 수 있다. 모두 14종이 발매된 이 음반의 뒷면 표지를 훑어보면 성음, 대도, 신세계의 상호를 달고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는 (순서대로) 뚝섬, 동대문, 역촌동에 있던 스튜디오를 말하며, 이 스튜디오들은 나현구 사장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음반사들은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마스터 테이프를 가지고 공장에서 음반을 프레스했을 뿐이다.

그런데 '골든 포크'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여기 수록된 곡들의 사운드는 '어쿠스틱 포크'도 아니고 '일렉트릭 록'도 아닌 특이한 사운드다. 이런 사운드를 '프로듀싱'한 사람은 나현구 사장이라고 쳐도 이런 음악을 연주해낸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옴니버스 음반'이란 것이 여러 가수나 그룹의 곡을 모은 것이라서 일관성이 없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Golden Folk Album]의 경우 노래를 부른 가수는 달라도 연주와 사운드는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 무언가 '팀웍'이 탄탄한 그룹이 연주하지 않고 세션맨을 그때그때 불러서는 만들어내기 힘든 연주다.

동방의 빛, 오리엔트 스튜디오의 '하우스 밴드'?


강근식의 연주 음반 [Rain Rain Rain](대도, 1974.8.10)에 실린 사진: 좌로부터 강근식(기타), 유영수(드럼), 이호준(위, 키보드), 조원익(아래, 베이스)

오리엔트에 '전속'되어 있던 이 밴드의 이름은 '동방의 빛'이다. 동방의 빛의 탄생은 가수이자 작곡가인 이장희와 그의 '그림자'인 기타리스트 강근식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의 관계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성어까지 떠올리게 하는데, 이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이장희 전기'를 읽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밴드의 완성은 성음 레코드의 소유의 뚝섬 스튜디오 세션 뮤지션이었던 유영수(드럼), 조원익(베이스), 이호준(키보드)등이 가담하면서 이루어졌다. 이들 중 조원익이 이전에 재즈 캄보인 정성조 쿼르텟에서 활동했고(따라서 김민기 1집과 양희은 2집에서 베이스는 그가 연주한 것이다) 뒤에는 검은 나비에서 활동했다는 사실, 그리고 유영수가 '정성조와 메신저스'에서 활동했고 유영수와 이호준이 뒤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했다는 사실 등은 훨씬 더 많은 정보 중의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이들의 공식 공연은 1974년 4월 이대강당에서 개최된 이장희의 두 번째 리사이틀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이 '그룹 사운드'는 이장희의 정식 공연 외에는 미 8군 무대든 일반 무대든 일상적으로 연주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그룹 사운드의 관행으로서는 이례적이다. 실제로 그룹의 리더인 강근식은 '그룹 사운드' 출신이 아니다. 물론 그 역시 대학생 시절 이태원의 007 클럽에서 연주한 일이 있지만 그건 '겨울방학에 몰래 아르바이트한' 수준이었으므로 그들의 '출신성분'을 좌우할 만한 이력은 아닌 셈이다.

그렇지만 강근식 역시 김희갑, 정성조, 안건마처럼 '캄보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가 거친 캄보는 다른 인물들과는 경로가 많이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강근식은 미 8군 무대나 일반 무대에서 배출된 직업적 연주인이 아니라 대학생 아마추어 캄보 출신이었다. 이름은 '홍익 캄보'인데 문자 그대로 홍익대학교에 소속된 캄보 밴드였다. 이 대학생 캄보 밴드는 '건전한 청년문화 선도' 차원에서 대학 당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어쨌든 이들은 기타 둘, 베이스, 드럼, 피아노로 구성된 5인조로 학내의 각종 행사에 참여했고, 1967년부터 개최된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 페스티발]에서 1회와 2회 모두 대상을 차지하는 성과도 이룩했다. 이들로부터 1970년대 캠퍼스 그룹 사운드 의 맹아를 발견하면 과장일까. 어쨌든 홍익 캄보는 '일렉트릭 그룹'의 사운드가 대학생 문화의 결합한 드문 사례인 것은 분명하다.

김세환 - 비(1973)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4월과 5월 - 옛사랑(1974) (백순진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투 코리언스 - 그건 너(1974) (이장희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동방의 빛은 강근식이 군대를 졸업하고 이장희와 다시 해후한 1973년 경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장희의 세 번째 독집이 대박을 기록하면서 수많은 음반의 레코딩 세션을 담당했다. 이장희를 필두로 김의철, 원 플러스 원, 윤지영 등이 레코딩 데뷔를 했을 뿐만 아니라 4월과 5월, 송창식, 김세환, 투 코리언스 등 거물급 음악인들이 이적해 오면서 '한국 포크의 명반'이라고 불릴 만한 작품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바보들의 행진]의 사운드트랙이 '골든 포크 앨범' 시리즈의 하나로 발매된 것도 기억해둘 만한 일이다.

송창식 - 왜 불러(1975) (송창식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Golden Folk Album vol.11 - 바보들의 행진] 수록)
송창식 - 날이 갈수록(1975) (김상배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Golden Folk Album vol.11 - 바보들의 행진] 수록) >
송창식 - 고래사냥(1975) (김상배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Golden Folk Album vol.11 - 바보들의 행진] 수록 )

동방의 빛은 이 모든 음반들에서 세션을 담당했다. 그렇지만 동방의 빛은 클래식의 오케스트라나 재즈의 빅 밴드와 비슷한 형태였던 메이저 음반사의 '전속관현악단'과는 달리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연주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면 '포크 록'이라고 할 만한 스타일을 전문적으로 연주했던 동방의 빛은 일종의 하우스 밴드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주) 하우스 밴드는 이제까지 '미군 클럽'에 전속된 밴드라는 의미로 사용해 왔다. 그렇지만 하우스 밴드라는 용어가 '상주(常住)하는 악단'이라는 뜻이라면 '스튜디오에 상주하는 밴드'라는 의미로도 이 용어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 등에서는 한 클럽이나 스튜디오에서 '상주'하면서 연주하는 백 밴드를 하우스 밴드라고 지칭하는데, 1960년대 소울 음악의 한 산실이었던 멤피스의 스택스/볼트(Stax/Volt)의 하우스 밴드 부커 티 앤 디 엠지스(Booker T. & The MG's)를 기억할 것이다. 모타운 레이블의 경우에도 역시 이런 하우스 밴드인 훵크 브라더스(The Funk Brothers)가 있었다. 그런데 대개 일반인들은 스택스/볼트의 경우와는 다르게 하우스 밴드의 이름을 인식하지 못했다. 모타운 신화의 주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음반 커버에서 이들의 이름을 빼버린 베리 고디 주니어의 마케팅 전략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대입해보면 프로듀서였던 나현구의 역할은 모타운의 베리 고디 주니어의 역할과도 비슷하겠지만, 연주인의 이름을 제명했다는 점에서는 일치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연주인들이 표기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의식적인 전략이었는지 아닌지는 증명하기 어렵다. 물론 이를 두고 신경쓸 만한 일이 아니었을 공산이 크지만. 어쨌거나 동방의 빛 연주자들의 요구로 후일에는 멤버들의 이름이 음반에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리엔트 프로덕션에서 어떤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는지 상상해 보자. 오리엔트는 전문화된 분업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이장희(작사와 작곡), 동방의 빛(편곡과 연주), 나현구(프로듀싱과 비즈니스)의 삼위일체라고 할까. 먼저 나현구 사장이 오디션 등을 통해 가수를 선정하고 음반에 수록될 곡을 선정하는 등 우선적인 디렉팅 작업을 한다. 그 뒤 이 곡들을 강근식이 편곡하고 동방의 빛이 연습하여 반주를 녹음한다. 이때 드럼과 베이스는 대체로 한번에 끝나지만 기타와 키보드는 몇 차례 더빙을 할 때가 많다. 이렇게 녹음된 트랙들은 이른바 핑퐁 녹음에 방식으로 계속 오버더빙된다. 이때 나현구는 복잡한 무그의 매뉴얼을 함께 해석하고 조작하는 등 악기와 장비 운영부터 전체 사운드 메이킹에까지 관여했고, 심지어는 심지어 피아노나 플루트 연주, 심지어 배킹 보컬 등에도 참여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녹음된 반주에 맞춰 보컬들의 노래가 덧입혀진다. 이때 가수의 역할은 어떤 수준이었을까? 사람마다 편차가 존재했다고 한다. 송창식 같은 간판급 스타의 경우는 자신이 직접 기타 연주를 하기도 했지만(거의 유일할 것이다), 대부분은 미리 연주된 사운드에 맞추어 단지 노래만을 불렀다.

이처럼 편곡과 세션을 동방의 빛이 맡고 전체 프로듀싱을 나현구가 담당하는 형태였으므로 당시 음반에 기재되던 '아무개 작편곡집'이라는 글귀는 오리엔트에서 제작한 음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곡만 스튜디오 외부에서 이루어질 뿐 모든 과정은 스튜디오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시스템이 일관되고 체계적인 전문 레이블을 탄생시켰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런 이득은 단지 음악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미학과 경제학

모두 Vol.14까지 발매된 [Golden Folk Album] 편집 음반은 성음, 대도, 신세계의 음반사 상호를 달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나현구 사장의 휘하에서 작업된 음반들이다. 사진은 [Golden Folk Album] Vol. 5이다.

오리엔트 역시 애플처럼 독집 앨범과 '옴니버스 음반'의 판매를 병행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는 기존 히트곡의 되팔기라는 측면도 있지만 일종의 '샘플러' 같은 역할도 수행했다. 예를 들어 [바보들의 행진]의 사운드트랙이 수록된 [Golden Folk Album Vol. 11]에는 송창식의 "왜 불러" 등이 실렸는데, 이 곡은 송창식의 '정규 앨범'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또한 이때까지 공식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조동진의 곡들도 이런 컴필레이션 음반 시리즈를 통해 들을 수 있다.

김세환 - 그림자 따라(1973) (조동진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투 코리언스 - 들리지 않네(1974) (조동진 작사·작곡, 동방의 빛 연주)

주)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동아기획 사단의 헤드쿼터가 되는 조동진은 이미 1970년대 초부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72년 12월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첫 번째 이장희 리사이틀에서 이후 동방의 빛이 되는 멤버들과 함께 참여, 리듬 기타 연주 및 노래를 하기도 했다. 성음 스튜디오 시절 잠시 세션 활동을 한 조동진은 강근식과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배수연, 이영림, 조원익 등과 더불어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Dark Side Of The Moon], 킹 크림슨(King Crimson)을 커버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다음은 조동진이 작곡한 곡들과 수록된 앨범의 리스트다.
윤형주 - "작은 불 밝히고" [Golden Folk Album Vol. 4] (대도, 1974)
김세환 - "그림자 따라" [Golden Folk Album Vol. 5](대도 DSO 0031, 1974)
조동진 - "작은 배" [Golden Folk Album Vol. 5](대도 DSO 0031, 1974)
투 코리언스 - "들리지 않네"([Two Koreans] 대도, DSO 0033, 1974)
김세환 - "마지막 노래"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 Vol.2](1973)

오리엔트 스튜디오는 연주자들이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으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또한 거액을 투자해야 하는 콘솔 같은 레코딩 장비보다는 악기 및 이펙트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 새로운 사운드에 대한 통제와 실험이 가능한 환경은 조성되었다. 물론 여러 차례에 걸친 오버더빙으로 인해 음질의 손실은 감수해야 했지만... 이렇게 작은 인원으로 거의 모든 제작과정을 통합한 이 시스템은 김정호나 어니언스가 속했던 애플의 경우보다도 비용을 절감시켰다. 단적으로 말해 관악기나 현악기 등이 사용되지 않았고(많은 수의 악단을 부르지 않았고), 기성의 작편곡가도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히려 직업적 작편곡자가 디렉팅한 음악에 비해 색다른 사운드의 질감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경제적 측면과 미학적 측면을 동시에 충족되었거나 할까.

동방의 빛은 포크뿐만 아니라 클래식, 재즈, 컨트리, '경음악' 등으로부터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했다. 이런 자양분들과 더불어 무대 공연이 아닌 스튜디오 세션 위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음향적 실험을 단행할 수 있었다. 선구적으로 수입된 악기 및 이펙트들도 이런 실험에 공헌했다. 동방의 빛의 사운드는 드럼-베이스-기타-오르간의 기본 편성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타가 여러 번 더빙되어 다양한 톤의 소리를 낸다. 물론 기본적인 기타 톤은 '클린 톤'을 바탕으로 하지만 관악기나 현악기가 담당하는 주요 선율을 담당할 때는 톤이 변화된다. 이를 위해 퍼즈, 와와, 뮤트론 등 다양한 이펙트들이 동반되었는데, 이를 통해 현악기나 관악기의 생음과는 다른 독특한 질감이 형성된다. 한편 기타와 더불어 무그 신시사이저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지금 들으면 장난감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 소리였다. 물론 당시의 신시사이저는 매뉴얼이 복잡했을 뿐만 아니라 단선율만 연주된다는 치명적 한계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이를 여러 대 사용하여 두터운 소리를 만들어 냄을 알 수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이들이 심취했던 프로그레시브 록의 사운드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아 있는 음원 중에서는 송창식이 부른 "새는"의 종반부에서 그 단초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지만.

여기서 잠시 애플과 오리엔트의 차이를 부연하면 애플의 경우는 '업소(셸부르)-방송(별이 빛나는 밤에)-음반제작'으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를 소유했다면, 오리엔트의 경우는 업소나 방송과 같은 시스템은 가지지 않았고 다만 스튜디오라는 음반제작 환경을 철저하고 전문적으로 통제한다. 다른 레코드사들이 청계천에 근거지를 삼고 있었던데 반해 오리엔트의 스튜디오는 이와는 거리가 먼 역촌동에 최종적으로 정착한다. 이런 두 지역 간의 거리감은 물리적 거리이자 상징적인 거리가 아닐까. 나현구가 왜 스튜디오 이외의 시스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포크의 훼절? 아니 '포크 록'의 유산(流産)

포크의 정사(正史)가 아니라 비전(秘傳)을 다룬다는 우리의 생각을 이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포크가 '아마추어적이고 공동체적 실천'을 넘어서 대중음악의 하나의 양식으로 성립하는 과정에서 다른 음악들과의 조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실천'이 공연이나 음반을 통해 대중과 만나면서부터 록의 비트나 재즈의 화성 나아가 클래식의 멜로디가 도입되는 사례는 점차 증가했다. 그리고 1973~5년의 시기는 이런 간헐적 시도들이 몇 개의 양식을 낳은 시기였다.

이런 결과에 대해 포크 공동체가 가졌던 순수성의 정신이 퇴색되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다. 단적인 예로 1973~4년 애플과 오리엔트에서 제작된 음반들을 포크 록으로 부를지 포크 팝으로 부를지 새로운 용어를 개발해야할지는 미지수다. 그렇지만 이들 음반들이 히트를 기록하면서 '통기타 포크'를 고수하는 흐름보다는 포크와 다른 장르의 융합을 시도하는 흐름이 더욱 활발했다. 먼저 백순진, 김태풍의 4월과 5월은 이수만 및 민영진, 김찬 등 서울대, 연세대의 아마추어 출신 뮤지션을 규합해 5인조 그룹인 '들개'를 결성했다. 또한 신중현의 디렉팅 하에 싸이키델릭 음반을 발표한 경험이 있는 서유석의 경우에도 서울대의 스푸키스 멤버 일부와 함께 포크 록 그룹을 결성했다. 그룹 사운드 가운데서도 영 사운드나 템페스트같은 경우는 '포크 록'을 추구하면서 '대학가'를 다루는 곡을 발표한 케이스였다.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캠퍼스 그룹 사운드'의 맹아는 이때부터 출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는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지금 시점에서 들개들이나 서유석이 시도했다는 포크 록은 들을 수 없다. 물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못했다. 포크는 본의 아니게 한때 가요정화운동의 수혜자였지만 점차 퇴폐적이고 불온한 문화라는 공작정치의 희생양이 된다. 그리고 결국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라는 철퇴가 내려졌다. 물론 라이센스 음반 제작으로 국내 음반 제작의 위축이라든가 석유 파동으로 인한 경기침체 등의 요소도 이런 철퇴 중의 하나였다. 마침내 오리엔트가 1억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부채를 가지고 있다는 설이 돌더니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오리엔트의 몰락은 대마초 파동만큼이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애플의 몰락에 대해서도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로써 한국에서 포크와 록의 만남(그걸 '포크 록'이라고 부르든 '포크 팝'이라고 부르든)이라는 프로젝트는 유산(流産)되고 말았다. 부연하자면 우리가 포크와 록의 만남에 주목하는 것은 단지 장르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진솔하고 진지한 가사를 담아 자작자연(自作自演)하는 아마추어적인 실천 양식으로서의 포크가, 제대로 음악공부를 한 전문적인 직업 연주인과 만나면서 불러일으킨 화학 반응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음악양식에 영향을 받아 1970년대 후반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진 음악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음악을 무엇이라고 부를지 정말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음악을 사람들이 계속 '포크'라고 부른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1973~1975년에도 이미 포크가 아니었던 음악을 그 뒤에도 계속 '포크'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포크가 아닌 음악, 그렇지만 포크가 아닌 것도 아닌 그 음악은 지금 경기도 교외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방 반주와 함께 흘러나오고 있다. 그걸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200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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