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동포들이어,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강산에 발을 들여 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중략)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동포가 하나 되어 우리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하략)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이 귀국 직후 한 연설의 일부분이다.
이렇게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종결되기 이전까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장소가 바로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직전인 2019년 11월에 사천 명사회 회원들과 중경과 귀양을 여행했다.
이곳 저곳 여행의 목적이었지만 그중 대한민국의 중국에서의 마지막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하는 것이 제일 큰 목적이었다.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일본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설립한 단체로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각 도의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을 공포하였으며, 4월 13일에는 한성 임시정부와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포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9월 11일에는 임시헌법을 제정·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하였다.
1919년 상해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박해가 심해지자,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치장(1939),중경(충칭,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를 따라 중경까지 옮겨와 중경에서도 4곳이나 전전하며 복원된 현재의 연화지청사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거쳐했던곳중 2곳은 일본군의 중경공습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1990년대 초,중경 도시 재개발 계획으로철거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한국과 중국 정부의 공동 노력으로 보존되어 1995년 8월 11일 정식으로 복원 및 개관했다.
충칭 임시정부 청사 복원 사업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고 역사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하는 민관 협업 사업의 하나로 LG하우시스에서 2억원 상당의 공사비와 개보수에 필요한 건축 자재를 지원하여 복원했다고 한다.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중경시 위중구의 작은 골목안에 있다.
1945년 1월, 중국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발걸음은 이곳에서 멈추었다.
중경에서의 네 번째이면서 마지막 청사인 이 곳. 바로 충칭 연화지 청사이다.
정부는 충칭에서 석판가ㆍ양류가ㆍ오사야항의 3곳에 청사 건물을 두어 사용하였고 마지막으로 1945년 1월 부터 8월까지 이곳 연화지 청사를 사용하였다. 이 곳은 1천300㎡의 대지에 건축 면적 1천770㎡으로, 보존되고 있는 중국 각지의 임시정부 청사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한다.
이곳은 크게 다섯 건물로 이루어져있다.
1호 건물은 전시관으로, 2호 건물은 외무부 관련, 3호 건물은 내무부, 재무부, 김구주석판공실, 국무위원회의실, 4호 건물은 주석비서실, 차리석 등의 집무실, 5호 건물은 전시실과 외빈접대실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실이 있는 1호 건물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시 전경, 전반적인 소개를 담고 있다.
1호 건물의 전시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서 이동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소개한다.
특히 한국광복군 및 충칭공습 등과 관련된 설명은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2호 건물에는 임시의정원 회의실, 외무부, 외무부장 집무실, 외무차장 집무실이 위치해 있다.
당시 외무부는 총무과, 외사과, 정보과, 외교연구위원회, 주미외교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시기 외무부장은 조소앙 선생이었다.
3호 건물의 내무부, 재무부의 경우 회의실을 복원해 둔 곳이다.
4호 건물은 1층의 외빈숙소와 주석비서실, 그리고 2층의 집무실들로 구성되어
5호 건물은 1층은 충칭의 특산물을 소개하는 전시실로, 2층은 외빈접대실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곳에서 구체화된 삼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새 헌법에 반영하였고 이는 곧 1948년의 대한민국 헌법에도 반영되었다.
그렇기에 충칭은 임시정부로서는 마지막이었을지 몰라도 한반도에서의 정부수립의 시발점이 되는 장소로서 기능하고 있다.
1919년 3.1운동으로 시작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벌써 100년이 넘었다.
삼일운동과 임시정부가 수립 된지 101년, 과연 우리는 일상 속에서 나라를 되찾으려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이들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감사하고 있었는지….
중경을 방문하면서 새삼 가늠조차 안되는 그분들의 가슴에 품었던 마음가짐을 감히 더듬어본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하고
이듬해 상해에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장개석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뤄양군관학교와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을 피해 청사를 옮겨 다니며 군대를 창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어려움을 딛고 비로소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에 정착하게 된 임시정부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의 주도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국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당시 김구 선생은 지청천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이범석 장군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여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통해,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발표하며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천명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이후 영국군과도 연합하여 인도·미얀마 작전에 참가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패망의 길을 접어든 1945년, 임시정부는 미군과 손잡고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는데, 일명 ‘독수리 작전’으로 불렸던 한미연합작전이었다.
이때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미국 전략 사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 보내 정예요원으로 훈련 시켰다.
경술국치일을 맞아 8월 29일에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할 생각으로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OSS 특수부대원들은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듣게 된다.
중경에서 고군분투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광복을 맞이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머문 6년은 중국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기간 중 가장 중요하고 활발했던 시기로 평가받게 되었다.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독립운동 사적지 중 규모가 가장 큰 전시관이며, 이곳에서 독립운동가와 광복군의 사진과 유물, 영상 자료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과거 임시정부 요인이 사용한 물품들도 실제 보존되어 있기에 관람하는 동안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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